우연을 환대하며 필연을 선택하는 법
<면도>, <매혈기>, <버티고>,
그리고 <정순> 정지혜 회원
6th 여성감독 작업노트 "가장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영화만들기 A to Z"
일시 : 2026. 4. 25 (토)
장소 : 서울여성플라자
발표 : 정지혜 감독
사회 : 박나나 감독

1. 첫 장편이라는 성장통
시작으로 돌아가 보면, 이 작품은 2019년 부산영상위원회 기획개발 멘토링에 선정되면서 출발하게 되었고, 김희정 감독님의 멘토링 아래 약 6개월간 시나리오를 발전시키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당시 장편 경험이 없었던 저는 10장도 채 되지 않는 초안을 제출했지만, “일단 늘리자”는 방향 속에서 서사를 확장해 나가며 작품의 핵심을 찾아가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멘토링 과정에서 시민 모니터링단의 피드백은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대략 80페이지에 달하는 관객 반응을 통해 시나리오가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초반에 설정했던 강한 결말에 대해 재고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처음 시사하는 첫 관객의 평처럼 느껴졌기에, 더욱 깊이 새겨들었던 것 같다. 이 과정을 거쳐 약 1년 만에 시나리오가 완성되었고, 이후 제작 지원 사업에 도전하게 되었다.
부산영상위원회 지원에서는 탈락했지만, 영화진흥위원회 지원에 선정되며 영화 제작이 가능해지게 되었다. 당시 주변에서는 제작 경험 부족에 관한 걱정이 많았지만, 결국 직접 제작사를 설립하고 함께할 사람들을 모아 제작을 진행하게 되었다. 영화는 경남 양산에서 올로케이션 촬영되었고, 2021년 1월 촬영에 들어가 15회차로 마무리되었다.
촬영이 끝나고 나서의 문제는 처음 장편을 준비한 미숙함으로 인해, 예산을 프로덕션까지만 고려했던 것이었다. 이후 후반 작업이나 배급, 유통 과정의 예산을 미리 빼두지 못했다보니, 재정적인 부담과 여러 현실적인 문제가 불어졌다. 다행히 후반 작업 지원과 추가 지원 사업, 영화제 수상을 통해 이를 일부 해결하게 되었다. 이 경험을 통해 장편 제작에서는 재정적 안전장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체감하게 되었다. 이후 프로듀서로도 참여하며 제작 환경에 대한 이해를 넓히게 되었고, 감독 개인에게 과도한 리스크가 가지 않도록 구조를 설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배우게 되었다. <정순>은 2022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첫 상영 이후 여러 차례 개봉 지원에서 낙방을 겪었으나, 재도전 끝에 지원을 받아 2024년 4월 극장 개봉으로 이어지며 긴 여정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2. 지역에서 영화하기
현재 ‘CINEMARU’라는 1인 제작사를 기반으로 부산과 경남에서 계속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제가 그 지역을 떠나 살아본 경험이 없다 보니, 익숙한 공간에서 익숙한 사람들과 영화를 만든다는 감각으로 지금까지 계속 작업을 이어오게 되었다. 사실 저는 지역에서만 영화를 해봤기 때문에 객관적인 비교를 하기는 어렵지만, 그 안에서 느낀 장단점은 분명히 있다. 가장 크게 느끼는 건 정보 접근성이 느리고 취약하다는 점이었다. 중앙 인프라 바깥에 있다 보니 매번 한 발 늦는다는 인상을 받았고, 무엇보다 인력이 계속 빠져나가고 있다는 걸 체감하게 되었다. 그 이유도 결국은 환경 때문이었다. 부산에서는 1년에 제작되는 장편 영화가 많지 않다 보니 영화 일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가 어려운 구조이다. 그래서 대부분 다른 일을 병행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인력이 빠져나가게 되는 흐름이 반복되고 있었다. 반대로 장점도 분명히 있었다. 로케이션 같은 경우에는 지인들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서, 실제로 <정순>은 어머니 도움으로 80~90%를 섭외하게 되었고, 그 덕분에 로케이션 비용이 거의 들지 않았다.
또 하나의 특징은 당시 스태프들이 대부분 제 또래였다는 점이다. 이미 여러번 함께 작업을 했던 친구들이기에, 조금 더 편하고 효율적으로 소통을 했던 부분은 있다. 하지만 저를 비롯한 대부분의 스탭들이 첫 장편이다보니, 동시에 경험 부족에서 오는 시행착오나 부딪힘도 분명히 존재했던 현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두 번째 작품도 부산과 경남에서 촬영하게 되었다. 왜 계속 이 지역에서 작업을 하게 되는지를 스스로 돌아보면, 결국 제가 쓰는 이야기와 캐릭터가 제가 살아온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출발하기 때문이었다. 이걸 낯선 환경에서 만든다는 것이 아직까지는 저에게는 조금 어색하고, 덜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이 지역에서 작업을 하게 될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금 시점에서는 여전히 부산과 경남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이 남아 있는 상태이다. 어떤 불편함이나 한계가 있더라도, 그걸 감수하면서까지 계속 이 지역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는 이유도 결국 그 지점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정순> 스틸
3. 조각으로 빚은 캐릭터
이 영화는 디지털 성범죄라는 사회적 문제에서 출발했지만 특정 사건이나 인물을 모델로 삼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레퍼런스를 배제하고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로 접근하려 했던 작업이었다. 그렇기에 영화 내 인물들이 주변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인물들로 채워지길 바랐던 마음이 컸다. 그래서 실제로 식품공장에서 함께 일했던 분들이나, 엄마나 이모 같은 주변 중년 여성들의 말투나 행동을 많이 관찰하고 그 디테일을 캐릭터에 담으려고 했다.
또 하나 크게 느꼈던 건, 배우가 채워주는 영역이었다. 장편 작업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제가 비워둔 부분들이 많았는데, 김금순 배우님이 그 빈칸을 자연스럽게 채워주는 순간들이 많았고, 저는 그게 이 영화의 가장 큰 자산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이를테면 정순과 유진이 말다툼을 하는 부엌 씬에서, 정순이 싱크대를 부여잡고 “엄마”라고 부르며 목놓아 우는 장면이 있다. 대본에는 “엄마”라는 대사가 없었는데, 김금순 배우가 현장에서 떠오른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장면이다. 금순배우로부터 “지금 정순에게도 엄마가 필요할 것 같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정말 머리를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 이 영화가 모녀의 관계를 다루고 있고, 정순 역시 누군가의 딸이라는 사실이 그 장면 하나로 압축되어 전달된다고 느꼈다.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현장에서 경직되는 순간들이 많았는데, 배우들의 제안을 통해 조금씩 유연해질 수 있었다. 그때 ‘이런 보물 같은 것들을 어떻게 하면 더 잘 받아낼 수 있을까’라는 고민과 다짐이 자연스럽게 생겼다.
영수와 정순이 대립하는 모텔 씬에서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영수가 자신의 남성성이 거부당했다고 느끼며 화를 쏟아내는 상황에서, 정순이 “왜 그래”라고 말하는 대사가 있다. 원래는 100% 분노에 가까운 톤으로 상상했던 장면이었다. 그런데 현장에서 김금순 배우는 그 대사를 어린아이를 달래듯, 훨씬 부드럽고 낮은 톤으로 풀어냈다. 그 순간, 폐쇄된 공간에서 단둘이 마주한 상황에서 과연 정순이 감정을 그대로 폭발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오히려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상황을 무마하고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하지 않을까 하는 쪽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이처럼 배우와의 작업 과정에서, 이미 정해진 정답을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함께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걸 실감하게 되었다. 그런 순간들이 쌓이면서 영화의 중요한 결들이 만들어졌고, 영화를 혼자 만드는 작업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현장에서의 유연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깊이 체감하게 되었다.
4. 예측 불허한 순간의 미학, 우연을 필연으로
코로나 시기에 촬영을 준비하면서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가 로케이션이었는데, 특히 식품 공장은 섭외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실제로 촬영을 진행한 공장도 촬영 일주일 전에야 겨우 확정되었고, 그 전까지는 촬영 자체가 무산될 수도 있는 상황까지 갔었다. 다행히 양산의 한 어묵 공장에서 촬영을 허가해주어, 가동을 멈춘 주말 시간에 맞춰 빠르게 들어가 찍고 나오는 방식으로 공장 촬영을 진행하게 되었다. 문제는 이 작업장 공간이 영화에서 가장 많은 배우가 등장하고 동선도 복잡한 핵심 장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촬영 시간이 단 하루뿐이었다는 점이었다. 특히 정순이 노래를 부르고, 영수와 갈등을 겪고, 도윤과 대치하는 클라이맥스 장면을 마지막에 남겨둔 상태에서, 결국 이 모든 장면을 2시간 안에 촬영해야 하는 상황이 닥쳤다. 사전에 준비한 콘티는 무려 18컷에 달했을 만큼 중요한 장면이었고, 편집에서 선택지를 확보하기 위해 촘촘하게 설계해둔 상태였기 때문에, 계획대로 촬영하지 못한다는 사실 자체가 큰 부담과 절망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별도의 논의할 시간조차 없어, 남은 시간 안에 해낼 수 있는 방식으로 즉각적인 판단을 해야 했고, 결국 ‘마스터 샷 하나를 먼저 찍어보자’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김금순 배우와 간단한 동선 리허설만 진행한 뒤, 촬영감독과 함께 배우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촬영을 시작했고, 첫 테이크는 동선 문제로 중단되었지만 두 번째 테이크에서 OK가 나면서 그 장면이 그대로 영화에 사용되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원래 계획했던 18개의 컷은 편집 기준으로 약 8컷, 셋업 기준으로도 4~5개 정도로 축소된 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마스터 샷 촬영 과정은 오히려 굉장히 강렬한 경험으로 남았다. 좁은 공간 안에서 김금순 배우를 중심으로 수십 명의 배우와 스태프들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며, 마치 연극 무대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장면을 완주해냈고, 촬영이 끝난 뒤에는 모두가 ‘홀린 듯이 했다’고 말할 정도로 강한 집중 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공통된 긴장감이 오히려 현장의 에너지를 극대화시킨 것이다.
돌이켜보면, 만약 처음 계획대로 18개의 셋업을 모두 지키며 촬영했다면 이 장면이 지금처럼 강한 힘을 가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결과적으로는 우연에 가까운 선택이 더 좋은 결과로 이어진 사례였다. 이 경험을 통해, 준비한 계획을 실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장의 조건 속에서 유연하게 선택하고 집중할 때 오히려 더 큰 성취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을 체감하게 되었고, 그래서 이 장면은 특히 인상 깊은 순간으로 남아 있다.

정지혜 감독 X 박나나 감독 대담 및 질의응답
박) 단편과 장편 시나리오는 호흡도 너무 다르고 길이도 너무 다르지 않느냐. 물론 기획 개발 멘토분의 도움이 있었지만, 단편과 장편 작업과정은 무엇이 가장 다르고 힘들었는지?
정) 분량 늘리기. 첫 단편 영화가 9분, 두 번째 영화가 10분 그리고 세 번째 영화가 15분이었다. 그런데 정순 러닝타임이 대략 100분이다. 처음엔 정말 감이 안 와서 다른 감독님의 영화도 많이 찾아보곤 했다. 이전에 단편 작업을 할 때는, 글을 쓰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우고 새로 쓰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니 분량이 좀처럼 늘지 않는 거다. 그래서 별로여도 그냥 일단 놔두자라는 생각으로 계속 쓰는 훈련을 했다.
박) 시나리오를 고치다가 이제 손을 떼야 하는 지점이 있다. 프로덕션 일정이 임박했다든가, 혹은 정말 시나리오를 다 완성했다는 마음이 들거나 여튼 완고를 결정하는 기준이 무엇이었는지? <정순>의 경우 몇 고에서 마무리 되었는지?
정) 9.1 고에서 마무리 되었더라. (ㅡ 그 0.1 은 무엇인지?) 글쎄요. 잘 기억이 안납니다. (웃음) 기획개발의 모니터링 보고서를 보고서 크게 한 차례 수정을 거쳤다. 여러 가지 피드백을 받았었는데 제가 취할 건 취하고 취하지 않을 것들을 취하지 않으면서 이 영화의 큰 어떤 갈래가 정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캐스팅 이후에 배우들과 소통하며 마지막으로 다듬는 작업을 했었던 것 같다. 말씀대로 촬영 기한이 임박하기도 했고, 배우분들과 얘기 나누면서 어느 정도 다듬어졌을 때에는 제가 구조적으로 이 영화를 크게 수정하지 않는 한 이 영화가 이제는 다른 길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 시나리오 모니터링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피드백을 받다 보면 모두가 반대하는 길을 지켜내고 고집할 때도 있지 않느냐. 그들을 설득하며 내면의 확신을 갖게 될 때도 있고, 그런 과정을 거치며 이야기의 방향이 결정되고 영화의 아이덴티티가 생겨나는 것 같다. 그럴 때 있어서, 피드백에 많이 설득되는 편인지? 혹은 거의 말을 안듣는 편인지도 궁금하다.
정) 사실 저는 말을 잘 안듣는 편이다. 학생 때, 단편 영화를 만들 때에도 피드백을 여러 사람들에게 받지 않는 유형이었다. 그 이유는 제가 너무 잘 흔들려서인 것 같다. 고민이 너무 깊어지고 결정하지 못하게 되고 그런 성향이다보니, 오히려 좀 방어적으로 그런 기회들을 피하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아까 말씀드린 그 모니터링 보고서는 무조건적으로 받아야 하는 그런 과정이었다. 그런데 그게 저한테 있었던 벽을 크게 한 번 깨뜨려준 순간인 것 같다. 그 보고서들을 엑셀에 취합해서 볼 정도로 꼼꼼히 체크했다. (웃음)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말한 의견을 모아보고는, ‘이런 인상을 받은 이유가 뭘까?’ ‘그럼 나는 왜 이런 장면을 넣었을까’ 이런 식으로 정리를 하게 되었다. 정말 체계적인 시스템이라고 느꼈기에, 여러분들도 그런 기회가 있으면 꼭 참여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박) 2021년에 촬영을 했고, 2022년 전주 프리미어 상영 후, 개봉은 2024년에 하셨다. 제작부터 개봉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그 사이에 초조한 감정들도 있었을 것 같다. 어떤 마음으로, 또 어떤 활동을 하면서 지나왔는지?
정) ‘다음 작품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길어지며 정말 많이 초조했다. 영화제로 처음 관객분들을 만난 이후 공백이 생겼기에, 극장에서 개봉을 앞두고도 ‘우리 영화가 되게 동시대적이지 않을 것 같다’ 라는 어떤 불안감도 되게 강했다. 그런데 정말 견디고 버티는 수 밖에 없다. 두 번째 영화 시나리오 작업을 어떻게든 꾸역꾸역 하려던 것이 오히려 돌파구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시기에 금순 선배님과 함께 간 카페에서, <정순> 이야기를 하는 관객들의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그분들이 ‘정순이라는 영화가 좋다고 해서 보러 가려고 했는데, 딱 봐도 보기 힘들 것 같아서 안 보러 갔다’ 라는 얘기를 하셨다. 그 순간, 우리 영화가 시기적으로 지금 관객들이 극장에 가서 보고 싶어 할 만한 영화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것들이 다음 영화를 만드는 데 자양분이 돼줬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 영화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는 것도 중요하지만, 또 동시에 관객들이 보고 싶은 영화를 고민하는 것도 관객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방법이겠구나’라는 지점을 깨달았다.
박) 양산에서 지금 활동하고 계신 제작사 명 cinemaru 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정) 또렷하게는 기억나지 않는데… 사업자를 내려고 여러 가지를 고민을 하다가, 약간 말장난 같은 것을 하고 싶었다. 우선 시네마를 두고서 친구들과 고민하고 이야기 나누다, 마루라는 단어가 딱 튀어나왔는데 그 단어가 너무 좋더라. 마루는 신발을 벗고서 맨발로 올라가는 곳이지 않느냐. 나의 이야기들도 현실과 아주 맞닿아있는 이야기들이기에, 시네마루ㅡ라는 이름이 풍기는 분위기가 제작방향과 잘 들어맞는다고 느꼈다.
박) 연출자 본인을 포함한 스태프들이 대부분 첫 장편으로 <정순>에 참여했다하셨다. 그렇기에 내부적으로 뭉치는 어떤 결의도 달랐겠지만, 그만큼 어려움도 많았으리라 예상된다. 어떤 장단점이 있었는지?
정) 당시에는 나도 그렇고 우리 모두가 어떤 능숙한 유연함이 어쩔 수 없이 부족했다. 서로 또 친한 사이다 보니, 영화를 위하는 마음도 정말 컸다. 그러다 보니까 힘이 많이 들어갔고, 감정적 마찰도 자연히 생겨났다. 촬영을 마치고나면, 각자의 설움을 들어주며 시간을 많이 보냈다. (웃음) 지금 생각하면, 정말 적은 예산과 빠듯한 일정을 해낸 그때의 우리가 너무 대견하기도 하고 참 고맙기도 하다. 또 돌이켜보면 정말 그 나이였기에 해내지 않았나 싶다.
박) <정순> 도 그렇고, 지금 하시는 두번째 장편도 그렇고, 감독님이 있는 양산에서 영화들이 제작되고 있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부분에 대해 궁금한 부분이 참 많다. 어떤 이점이 있는지 알려달라.
정) 아무래도 지인분들이 많이 계신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다. 영화를 찍을 때마다 동네 분들의 힘을 아직 많이 받고 있다. <정순>의 식품공장도 코로나 시국에 정말 구하기 힘들었는데, ‘우리 동네의 학생이 영화찍는다는데 도와주자’라는 마음으로 대관을 허락해주신 것이다. 두 번째 영화도 마찬가지로, 영화에 지역 축제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도 양산에서 촬영을 했다. ‘우리 동네 출신 어린 어린 감독이 와서 찍는다는데 해줍시다!’ 하시면서 출연도 해주시고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럴 때마다, ‘참 영화 찍는 게 뭐라고, 또 내가 어디서 이런 도움을 받을 수 있겠나? 만약에 내가 양산이 아니라면 이런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도 많이 들고, 정말 많은 힘을 얻는다.

<정순> 스틸
박) 어두운 이야기를 쓰다 보면 캐릭터에 감정이입이 되거나 정서에 잠기게 되는 경우가 있다. <정순>의 경우, 디지털 성범죄라는 소재를 다룰 때 초반부터 긴장감이 이어지기도 하는 것 같다. 시나리오 작업하시면서 그런 부분을 어떻게 조절하셨는지, 혹시 스스로 환기를 시키거나 거리를 두기 위해 하셨던 방법이 있으셨는지 궁금하다.
정) 시나리오를 쓸 때는 감정에서 벗어나기보다는 오히려 ‘정순’이라는 인물과 더 가까워지려 하며 계속 파고드는 방식으로 작업했고, 특별히 거리를 두기 위한 방법을 찾기보다는 그 상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대신 김금순 배우로 캐스팅이 확정된 이후에는 그 감정의 일부를 금순 선배님에게 맡기고, 저는 한 발 물러나 지켜보는 쪽으로 작업 방식이 바뀌었다. 현장에서도 배우가 해석한 흐름을 존중하며 자연스럽게 장면을 완성해 나갔다.
질문) 사업자 등록으로 제작사를 처음 차리신 계기가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하셨는데, 이후 두 번째 작품부터는 대표로서 수익 구조나 이윤에 대한 부분도 함께 고려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제작사 운영 외에 별도로 병행하고 계신 프리랜서 작업도 있으신지 묻고 싶다.
정) 정순 개봉 이후에는 이윤을 남기는 것보다 ‘다시는 빚을 크게 지지 않겠다’는 기준이 더 중요해졌다. 재정적 부담이 다음 작품까지의 시간을 늦춘다는 걸 체감했기에, 이번에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한 상태에서 제작을 진행했다. 제작사 대표로서 모든 것을 끌고 가기보다는, 지원사업 피칭과 제작계획서 준비에 집중해 초기 단계에서 역할을 다하고 이후 제작 실무는 프로듀서에게 넘긴 채 연출에 집중했으며, 이전처럼 제작과 연출을 넘나드는 무리한 구조로 가지 않겠다는 판단 아래 작업을 이어갔다. 현재는 cinemaru를 통해 두 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생업으로는 스케치 및 홍보 영상 제작 일을 병행하기도 하고, 간헐적으로 강의도 진행하고 있다.
질문) 캐스팅 과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다. 시나리오를 쓰실 때부터 염두에 두었기에 캐스팅을 하신건지, 주연 인물 외에도 다른 분들 캐스팅은 어떻게 진행된 것인지?
정) <정순>의 경우에는 PD의 제안으로 김금순 배우를 떠올리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캐스팅으로 이어진 케이스였다. 이전에 단편에서 좋은 인상을 받았던 배우였기에, 직접 만나 뵙고 작업이 성사될 수 있었다. 그 외 식품공장의 동료 배역들이나 폐차장, 운전면허 학원 등 주요 배경에 등장하는 배우들 역시 부산·경남에서 활동하는 배우들을 중심으로 구성하게 되었다. 현실적인 예산의 한계도 컸지만, 동시에 지역에서 활동하는 배우들과 함께 작업해보고자 하는 마음도 컸다. 그래서 그런 극단들에 조심스럽게 오디션을 제안드렸을 때 많은 배우들이 흔쾌히 응해주신 덕분에, 지금의 캐스팅을 완성할 수 있었다.
질문) 제작지원 받을 때, 피칭을 잘하는 꿀팁 같은 게 있으신지 궁금하다! 그리고 어떤 질문이 대체로 나왔는지?
정) 부산영상위원회 2차때는 긴장감이 극에 달했는지 청심환을 먹고서도 마이크를 쥔 손이 좌우로 흔들렸다. (웃음) 그 영향 때문인지 탈락하게 되었다. 이후 영화진흥위원회를 준비하면서는 첫 경험에서의 실패를 계기로, 이번에는 오히려 ‘기세로 밀어붙여야겠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고, 스스로도 놀랄 만큼 당차게 나갔다. ‘자신감을 연기한다’는 마음가짐이었다. 당시 2차 심사는 지금처럼 비대면이 아니라 심사위원들이 둘러앉은 가운데 진행되는 면접 형식이었는데, 한쪽에서는 시나리오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질문이, 다른 한쪽에서는 작품의 필요성 자체를 의심하는 날카로운 질문이 번갈아 이어지는 분위기였다. 이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에는 담담하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부정적인 의견에는 “그렇게 보실 수도 있지만 저는 이런 이유로 이 이야기를 썼고 잘 해낼 자신이 있다”는 식으로 답변하며 끝까지 밀고 나갔다. 돌이켜보면 경험이 부족한 상황에서 “장편을 해낼 수 있겠냐”는 질문은 두 심사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받았던 핵심 질문이었고, 그에 대한 확신을 증명하기 위해 결국은 일종의 ‘패기’를 전면에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 와서 그것을 무조건적인 방법으로 권하기는 어렵지만, <정순>의 경우에는 그때의 패기로 끝까지 밀어붙였던 선택이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던 것 같다.
대개 지역에서 영화를 만드는 환경에 대한 질문과 함께, 당시에는 중년 여성 서사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질문도 종종 받았다. 심사 과정에서는 지역 제작 환경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상태라는 인상을 받아 그 부분을 보완해 설명하는 데 집중했다. 두 번째 장편의 경우에는 이미 전에 합을 맞췄던 PD와 다시 함께하게 되면서, 이미 검증된 작업 파트너라는 점을 강조할 수 있었고, 해당 PD님 역시 부산에서 여러 편의 장편 제작 경험을 갖고 있어 지역 기반 제작 역량을 설득력 있게 어필할 수 있었다.

<정순> 스틸
질문) 금순 배우와 감독이 생각하는 대사에 대한 해석이 다를 때도 있었고, 오히려 그런 지점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하셨다. 그럼 연출 과정에서 배우에게 디렉팅을 어떤 방식으로 소통하시는지 궁금하다.
정) <정순> 작업 때 김금순 배우와 작품을 해석하는 큰 차이는 많지 않았다. 그런데 딸 유진과의 관계에서 관계 톤에 대한 시각 차이가 있었다. 금순 배우님(정순 역), 선아 배우님(유진 역)은 처음에는 살갑고 가까운 모녀 관계로 생각하셨다. 그런데 저는 경상도에서 나고 자라다보니 모녀 관계를 서로에게 유일한 존재이지만, 마냥 다정하지만은 않고 다소 거칠때도 있고 티격태격하는 현실적인 관계를 원했다. 촬영 전에 미팅을 통해 그런 부분을 말씀드렸고, 현장에서는 ‘지금보다 더 무심한 느낌이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씀드리며, 대사의 온도나 거리감을 조금씩 조율해나가며 원하는 톤을 맞춰나갔다.
다만 전반적으로는 배우의 해석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결을 해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느꼈다. 실제로 현장에서 배우가 제안한 방식이 더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이를 최대한 반영하려고 했다. 또한 배우마다 작업 방식이 다르다는 점도 중요한 요소였는데, 예를 들어 공장 관리자 도윤 역의 용준 배우는 사전에 아이디어도 많이 내고, 애드리브를 많이 준비해와주시는 타입이라 가능한 한 많은 대화를 나누려 했고, 반대로 금순 배우와 선아 배우는 현장에서의 즉흥성과 반응을 더 중시하는 스타일이어서 실제 촬영에서의 현장감과 호흡을 서서히 맞춰가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결국 각 배우의 성향에 맞춰 디렉팅 방식을 유연하게 조정해가는 과정이 중요했던 경험이었다.
마무리 소회) 겸연쩍고 쑥스러운 자리일 수 있던 날을 함께해주신 감독님들 덕에 편안한 시간으로 채울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비슷한 경험과 과정을 통과하고 있는 동료 여성감독님들이 계시고, 소속되어 있고, 서로를 바라봐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창작자로서 큰 안정감과 안전함을 느낍니다. 저도 감독님들께 그런 존재이길 바라며, 무한한 응원을 보냅니다!
우연을 환대하며 필연을 선택하는 법
<면도>, <매혈기>, <버티고>,
그리고 <정순> 정지혜 회원
6th 여성감독 작업노트 "가장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영화만들기 A to Z"
일시 : 2026. 4. 25 (토)
장소 : 서울여성플라자
발표 : 정지혜 감독
사회 : 박나나 감독
1. 첫 장편이라는 성장통
시작으로 돌아가 보면, 이 작품은 2019년 부산영상위원회 기획개발 멘토링에 선정되면서 출발하게 되었고, 김희정 감독님의 멘토링 아래 약 6개월간 시나리오를 발전시키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당시 장편 경험이 없었던 저는 10장도 채 되지 않는 초안을 제출했지만, “일단 늘리자”는 방향 속에서 서사를 확장해 나가며 작품의 핵심을 찾아가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멘토링 과정에서 시민 모니터링단의 피드백은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대략 80페이지에 달하는 관객 반응을 통해 시나리오가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초반에 설정했던 강한 결말에 대해 재고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처음 시사하는 첫 관객의 평처럼 느껴졌기에, 더욱 깊이 새겨들었던 것 같다. 이 과정을 거쳐 약 1년 만에 시나리오가 완성되었고, 이후 제작 지원 사업에 도전하게 되었다.
부산영상위원회 지원에서는 탈락했지만, 영화진흥위원회 지원에 선정되며 영화 제작이 가능해지게 되었다. 당시 주변에서는 제작 경험 부족에 관한 걱정이 많았지만, 결국 직접 제작사를 설립하고 함께할 사람들을 모아 제작을 진행하게 되었다. 영화는 경남 양산에서 올로케이션 촬영되었고, 2021년 1월 촬영에 들어가 15회차로 마무리되었다.
촬영이 끝나고 나서의 문제는 처음 장편을 준비한 미숙함으로 인해, 예산을 프로덕션까지만 고려했던 것이었다. 이후 후반 작업이나 배급, 유통 과정의 예산을 미리 빼두지 못했다보니, 재정적인 부담과 여러 현실적인 문제가 불어졌다. 다행히 후반 작업 지원과 추가 지원 사업, 영화제 수상을 통해 이를 일부 해결하게 되었다. 이 경험을 통해 장편 제작에서는 재정적 안전장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체감하게 되었다. 이후 프로듀서로도 참여하며 제작 환경에 대한 이해를 넓히게 되었고, 감독 개인에게 과도한 리스크가 가지 않도록 구조를 설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배우게 되었다. <정순>은 2022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첫 상영 이후 여러 차례 개봉 지원에서 낙방을 겪었으나, 재도전 끝에 지원을 받아 2024년 4월 극장 개봉으로 이어지며 긴 여정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2. 지역에서 영화하기
현재 ‘CINEMARU’라는 1인 제작사를 기반으로 부산과 경남에서 계속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제가 그 지역을 떠나 살아본 경험이 없다 보니, 익숙한 공간에서 익숙한 사람들과 영화를 만든다는 감각으로 지금까지 계속 작업을 이어오게 되었다. 사실 저는 지역에서만 영화를 해봤기 때문에 객관적인 비교를 하기는 어렵지만, 그 안에서 느낀 장단점은 분명히 있다. 가장 크게 느끼는 건 정보 접근성이 느리고 취약하다는 점이었다. 중앙 인프라 바깥에 있다 보니 매번 한 발 늦는다는 인상을 받았고, 무엇보다 인력이 계속 빠져나가고 있다는 걸 체감하게 되었다. 그 이유도 결국은 환경 때문이었다. 부산에서는 1년에 제작되는 장편 영화가 많지 않다 보니 영화 일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가 어려운 구조이다. 그래서 대부분 다른 일을 병행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인력이 빠져나가게 되는 흐름이 반복되고 있었다. 반대로 장점도 분명히 있었다. 로케이션 같은 경우에는 지인들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서, 실제로 <정순>은 어머니 도움으로 80~90%를 섭외하게 되었고, 그 덕분에 로케이션 비용이 거의 들지 않았다.
또 하나의 특징은 당시 스태프들이 대부분 제 또래였다는 점이다. 이미 여러번 함께 작업을 했던 친구들이기에, 조금 더 편하고 효율적으로 소통을 했던 부분은 있다. 하지만 저를 비롯한 대부분의 스탭들이 첫 장편이다보니, 동시에 경험 부족에서 오는 시행착오나 부딪힘도 분명히 존재했던 현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두 번째 작품도 부산과 경남에서 촬영하게 되었다. 왜 계속 이 지역에서 작업을 하게 되는지를 스스로 돌아보면, 결국 제가 쓰는 이야기와 캐릭터가 제가 살아온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출발하기 때문이었다. 이걸 낯선 환경에서 만든다는 것이 아직까지는 저에게는 조금 어색하고, 덜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이 지역에서 작업을 하게 될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금 시점에서는 여전히 부산과 경남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이 남아 있는 상태이다. 어떤 불편함이나 한계가 있더라도, 그걸 감수하면서까지 계속 이 지역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는 이유도 결국 그 지점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정순> 스틸
3. 조각으로 빚은 캐릭터
이 영화는 디지털 성범죄라는 사회적 문제에서 출발했지만 특정 사건이나 인물을 모델로 삼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레퍼런스를 배제하고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로 접근하려 했던 작업이었다. 그렇기에 영화 내 인물들이 주변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인물들로 채워지길 바랐던 마음이 컸다. 그래서 실제로 식품공장에서 함께 일했던 분들이나, 엄마나 이모 같은 주변 중년 여성들의 말투나 행동을 많이 관찰하고 그 디테일을 캐릭터에 담으려고 했다.
또 하나 크게 느꼈던 건, 배우가 채워주는 영역이었다. 장편 작업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제가 비워둔 부분들이 많았는데, 김금순 배우님이 그 빈칸을 자연스럽게 채워주는 순간들이 많았고, 저는 그게 이 영화의 가장 큰 자산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이를테면 정순과 유진이 말다툼을 하는 부엌 씬에서, 정순이 싱크대를 부여잡고 “엄마”라고 부르며 목놓아 우는 장면이 있다. 대본에는 “엄마”라는 대사가 없었는데, 김금순 배우가 현장에서 떠오른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장면이다. 금순배우로부터 “지금 정순에게도 엄마가 필요할 것 같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정말 머리를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 이 영화가 모녀의 관계를 다루고 있고, 정순 역시 누군가의 딸이라는 사실이 그 장면 하나로 압축되어 전달된다고 느꼈다.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현장에서 경직되는 순간들이 많았는데, 배우들의 제안을 통해 조금씩 유연해질 수 있었다. 그때 ‘이런 보물 같은 것들을 어떻게 하면 더 잘 받아낼 수 있을까’라는 고민과 다짐이 자연스럽게 생겼다.
영수와 정순이 대립하는 모텔 씬에서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영수가 자신의 남성성이 거부당했다고 느끼며 화를 쏟아내는 상황에서, 정순이 “왜 그래”라고 말하는 대사가 있다. 원래는 100% 분노에 가까운 톤으로 상상했던 장면이었다. 그런데 현장에서 김금순 배우는 그 대사를 어린아이를 달래듯, 훨씬 부드럽고 낮은 톤으로 풀어냈다. 그 순간, 폐쇄된 공간에서 단둘이 마주한 상황에서 과연 정순이 감정을 그대로 폭발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오히려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상황을 무마하고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하지 않을까 하는 쪽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이처럼 배우와의 작업 과정에서, 이미 정해진 정답을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함께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걸 실감하게 되었다. 그런 순간들이 쌓이면서 영화의 중요한 결들이 만들어졌고, 영화를 혼자 만드는 작업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현장에서의 유연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깊이 체감하게 되었다.
4. 예측 불허한 순간의 미학, 우연을 필연으로
코로나 시기에 촬영을 준비하면서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가 로케이션이었는데, 특히 식품 공장은 섭외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실제로 촬영을 진행한 공장도 촬영 일주일 전에야 겨우 확정되었고, 그 전까지는 촬영 자체가 무산될 수도 있는 상황까지 갔었다. 다행히 양산의 한 어묵 공장에서 촬영을 허가해주어, 가동을 멈춘 주말 시간에 맞춰 빠르게 들어가 찍고 나오는 방식으로 공장 촬영을 진행하게 되었다. 문제는 이 작업장 공간이 영화에서 가장 많은 배우가 등장하고 동선도 복잡한 핵심 장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촬영 시간이 단 하루뿐이었다는 점이었다. 특히 정순이 노래를 부르고, 영수와 갈등을 겪고, 도윤과 대치하는 클라이맥스 장면을 마지막에 남겨둔 상태에서, 결국 이 모든 장면을 2시간 안에 촬영해야 하는 상황이 닥쳤다. 사전에 준비한 콘티는 무려 18컷에 달했을 만큼 중요한 장면이었고, 편집에서 선택지를 확보하기 위해 촘촘하게 설계해둔 상태였기 때문에, 계획대로 촬영하지 못한다는 사실 자체가 큰 부담과 절망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별도의 논의할 시간조차 없어, 남은 시간 안에 해낼 수 있는 방식으로 즉각적인 판단을 해야 했고, 결국 ‘마스터 샷 하나를 먼저 찍어보자’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김금순 배우와 간단한 동선 리허설만 진행한 뒤, 촬영감독과 함께 배우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촬영을 시작했고, 첫 테이크는 동선 문제로 중단되었지만 두 번째 테이크에서 OK가 나면서 그 장면이 그대로 영화에 사용되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원래 계획했던 18개의 컷은 편집 기준으로 약 8컷, 셋업 기준으로도 4~5개 정도로 축소된 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마스터 샷 촬영 과정은 오히려 굉장히 강렬한 경험으로 남았다. 좁은 공간 안에서 김금순 배우를 중심으로 수십 명의 배우와 스태프들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며, 마치 연극 무대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장면을 완주해냈고, 촬영이 끝난 뒤에는 모두가 ‘홀린 듯이 했다’고 말할 정도로 강한 집중 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공통된 긴장감이 오히려 현장의 에너지를 극대화시킨 것이다.
돌이켜보면, 만약 처음 계획대로 18개의 셋업을 모두 지키며 촬영했다면 이 장면이 지금처럼 강한 힘을 가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결과적으로는 우연에 가까운 선택이 더 좋은 결과로 이어진 사례였다. 이 경험을 통해, 준비한 계획을 실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장의 조건 속에서 유연하게 선택하고 집중할 때 오히려 더 큰 성취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을 체감하게 되었고, 그래서 이 장면은 특히 인상 깊은 순간으로 남아 있다.
정지혜 감독 X 박나나 감독 대담 및 질의응답
박) 단편과 장편 시나리오는 호흡도 너무 다르고 길이도 너무 다르지 않느냐. 물론 기획 개발 멘토분의 도움이 있었지만, 단편과 장편 작업과정은 무엇이 가장 다르고 힘들었는지?
정) 분량 늘리기. 첫 단편 영화가 9분, 두 번째 영화가 10분 그리고 세 번째 영화가 15분이었다. 그런데 정순 러닝타임이 대략 100분이다. 처음엔 정말 감이 안 와서 다른 감독님의 영화도 많이 찾아보곤 했다. 이전에 단편 작업을 할 때는, 글을 쓰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우고 새로 쓰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니 분량이 좀처럼 늘지 않는 거다. 그래서 별로여도 그냥 일단 놔두자라는 생각으로 계속 쓰는 훈련을 했다.
박) 시나리오를 고치다가 이제 손을 떼야 하는 지점이 있다. 프로덕션 일정이 임박했다든가, 혹은 정말 시나리오를 다 완성했다는 마음이 들거나 여튼 완고를 결정하는 기준이 무엇이었는지? <정순>의 경우 몇 고에서 마무리 되었는지?
정) 9.1 고에서 마무리 되었더라. (ㅡ 그 0.1 은 무엇인지?) 글쎄요. 잘 기억이 안납니다. (웃음) 기획개발의 모니터링 보고서를 보고서 크게 한 차례 수정을 거쳤다. 여러 가지 피드백을 받았었는데 제가 취할 건 취하고 취하지 않을 것들을 취하지 않으면서 이 영화의 큰 어떤 갈래가 정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캐스팅 이후에 배우들과 소통하며 마지막으로 다듬는 작업을 했었던 것 같다. 말씀대로 촬영 기한이 임박하기도 했고, 배우분들과 얘기 나누면서 어느 정도 다듬어졌을 때에는 제가 구조적으로 이 영화를 크게 수정하지 않는 한 이 영화가 이제는 다른 길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 시나리오 모니터링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피드백을 받다 보면 모두가 반대하는 길을 지켜내고 고집할 때도 있지 않느냐. 그들을 설득하며 내면의 확신을 갖게 될 때도 있고, 그런 과정을 거치며 이야기의 방향이 결정되고 영화의 아이덴티티가 생겨나는 것 같다. 그럴 때 있어서, 피드백에 많이 설득되는 편인지? 혹은 거의 말을 안듣는 편인지도 궁금하다.
정) 사실 저는 말을 잘 안듣는 편이다. 학생 때, 단편 영화를 만들 때에도 피드백을 여러 사람들에게 받지 않는 유형이었다. 그 이유는 제가 너무 잘 흔들려서인 것 같다. 고민이 너무 깊어지고 결정하지 못하게 되고 그런 성향이다보니, 오히려 좀 방어적으로 그런 기회들을 피하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아까 말씀드린 그 모니터링 보고서는 무조건적으로 받아야 하는 그런 과정이었다. 그런데 그게 저한테 있었던 벽을 크게 한 번 깨뜨려준 순간인 것 같다. 그 보고서들을 엑셀에 취합해서 볼 정도로 꼼꼼히 체크했다. (웃음)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말한 의견을 모아보고는, ‘이런 인상을 받은 이유가 뭘까?’ ‘그럼 나는 왜 이런 장면을 넣었을까’ 이런 식으로 정리를 하게 되었다. 정말 체계적인 시스템이라고 느꼈기에, 여러분들도 그런 기회가 있으면 꼭 참여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박) 2021년에 촬영을 했고, 2022년 전주 프리미어 상영 후, 개봉은 2024년에 하셨다. 제작부터 개봉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그 사이에 초조한 감정들도 있었을 것 같다. 어떤 마음으로, 또 어떤 활동을 하면서 지나왔는지?
정) ‘다음 작품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길어지며 정말 많이 초조했다. 영화제로 처음 관객분들을 만난 이후 공백이 생겼기에, 극장에서 개봉을 앞두고도 ‘우리 영화가 되게 동시대적이지 않을 것 같다’ 라는 어떤 불안감도 되게 강했다. 그런데 정말 견디고 버티는 수 밖에 없다. 두 번째 영화 시나리오 작업을 어떻게든 꾸역꾸역 하려던 것이 오히려 돌파구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시기에 금순 선배님과 함께 간 카페에서, <정순> 이야기를 하는 관객들의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그분들이 ‘정순이라는 영화가 좋다고 해서 보러 가려고 했는데, 딱 봐도 보기 힘들 것 같아서 안 보러 갔다’ 라는 얘기를 하셨다. 그 순간, 우리 영화가 시기적으로 지금 관객들이 극장에 가서 보고 싶어 할 만한 영화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것들이 다음 영화를 만드는 데 자양분이 돼줬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 영화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는 것도 중요하지만, 또 동시에 관객들이 보고 싶은 영화를 고민하는 것도 관객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방법이겠구나’라는 지점을 깨달았다.
박) 양산에서 지금 활동하고 계신 제작사 명 cinemaru 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정) 또렷하게는 기억나지 않는데… 사업자를 내려고 여러 가지를 고민을 하다가, 약간 말장난 같은 것을 하고 싶었다. 우선 시네마를 두고서 친구들과 고민하고 이야기 나누다, 마루라는 단어가 딱 튀어나왔는데 그 단어가 너무 좋더라. 마루는 신발을 벗고서 맨발로 올라가는 곳이지 않느냐. 나의 이야기들도 현실과 아주 맞닿아있는 이야기들이기에, 시네마루ㅡ라는 이름이 풍기는 분위기가 제작방향과 잘 들어맞는다고 느꼈다.
박) 연출자 본인을 포함한 스태프들이 대부분 첫 장편으로 <정순>에 참여했다하셨다. 그렇기에 내부적으로 뭉치는 어떤 결의도 달랐겠지만, 그만큼 어려움도 많았으리라 예상된다. 어떤 장단점이 있었는지?
정) 당시에는 나도 그렇고 우리 모두가 어떤 능숙한 유연함이 어쩔 수 없이 부족했다. 서로 또 친한 사이다 보니, 영화를 위하는 마음도 정말 컸다. 그러다 보니까 힘이 많이 들어갔고, 감정적 마찰도 자연히 생겨났다. 촬영을 마치고나면, 각자의 설움을 들어주며 시간을 많이 보냈다. (웃음) 지금 생각하면, 정말 적은 예산과 빠듯한 일정을 해낸 그때의 우리가 너무 대견하기도 하고 참 고맙기도 하다. 또 돌이켜보면 정말 그 나이였기에 해내지 않았나 싶다.
박) <정순> 도 그렇고, 지금 하시는 두번째 장편도 그렇고, 감독님이 있는 양산에서 영화들이 제작되고 있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부분에 대해 궁금한 부분이 참 많다. 어떤 이점이 있는지 알려달라.
정) 아무래도 지인분들이 많이 계신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다. 영화를 찍을 때마다 동네 분들의 힘을 아직 많이 받고 있다. <정순>의 식품공장도 코로나 시국에 정말 구하기 힘들었는데, ‘우리 동네의 학생이 영화찍는다는데 도와주자’라는 마음으로 대관을 허락해주신 것이다. 두 번째 영화도 마찬가지로, 영화에 지역 축제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도 양산에서 촬영을 했다. ‘우리 동네 출신 어린 어린 감독이 와서 찍는다는데 해줍시다!’ 하시면서 출연도 해주시고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럴 때마다, ‘참 영화 찍는 게 뭐라고, 또 내가 어디서 이런 도움을 받을 수 있겠나? 만약에 내가 양산이 아니라면 이런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도 많이 들고, 정말 많은 힘을 얻는다.
<정순> 스틸
박) 어두운 이야기를 쓰다 보면 캐릭터에 감정이입이 되거나 정서에 잠기게 되는 경우가 있다. <정순>의 경우, 디지털 성범죄라는 소재를 다룰 때 초반부터 긴장감이 이어지기도 하는 것 같다. 시나리오 작업하시면서 그런 부분을 어떻게 조절하셨는지, 혹시 스스로 환기를 시키거나 거리를 두기 위해 하셨던 방법이 있으셨는지 궁금하다.
정) 시나리오를 쓸 때는 감정에서 벗어나기보다는 오히려 ‘정순’이라는 인물과 더 가까워지려 하며 계속 파고드는 방식으로 작업했고, 특별히 거리를 두기 위한 방법을 찾기보다는 그 상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대신 김금순 배우로 캐스팅이 확정된 이후에는 그 감정의 일부를 금순 선배님에게 맡기고, 저는 한 발 물러나 지켜보는 쪽으로 작업 방식이 바뀌었다. 현장에서도 배우가 해석한 흐름을 존중하며 자연스럽게 장면을 완성해 나갔다.
질문) 사업자 등록으로 제작사를 처음 차리신 계기가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하셨는데, 이후 두 번째 작품부터는 대표로서 수익 구조나 이윤에 대한 부분도 함께 고려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제작사 운영 외에 별도로 병행하고 계신 프리랜서 작업도 있으신지 묻고 싶다.
정) 정순 개봉 이후에는 이윤을 남기는 것보다 ‘다시는 빚을 크게 지지 않겠다’는 기준이 더 중요해졌다. 재정적 부담이 다음 작품까지의 시간을 늦춘다는 걸 체감했기에, 이번에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한 상태에서 제작을 진행했다. 제작사 대표로서 모든 것을 끌고 가기보다는, 지원사업 피칭과 제작계획서 준비에 집중해 초기 단계에서 역할을 다하고 이후 제작 실무는 프로듀서에게 넘긴 채 연출에 집중했으며, 이전처럼 제작과 연출을 넘나드는 무리한 구조로 가지 않겠다는 판단 아래 작업을 이어갔다. 현재는 cinemaru를 통해 두 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생업으로는 스케치 및 홍보 영상 제작 일을 병행하기도 하고, 간헐적으로 강의도 진행하고 있다.
질문) 캐스팅 과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다. 시나리오를 쓰실 때부터 염두에 두었기에 캐스팅을 하신건지, 주연 인물 외에도 다른 분들 캐스팅은 어떻게 진행된 것인지?
정) <정순>의 경우에는 PD의 제안으로 김금순 배우를 떠올리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캐스팅으로 이어진 케이스였다. 이전에 단편에서 좋은 인상을 받았던 배우였기에, 직접 만나 뵙고 작업이 성사될 수 있었다. 그 외 식품공장의 동료 배역들이나 폐차장, 운전면허 학원 등 주요 배경에 등장하는 배우들 역시 부산·경남에서 활동하는 배우들을 중심으로 구성하게 되었다. 현실적인 예산의 한계도 컸지만, 동시에 지역에서 활동하는 배우들과 함께 작업해보고자 하는 마음도 컸다. 그래서 그런 극단들에 조심스럽게 오디션을 제안드렸을 때 많은 배우들이 흔쾌히 응해주신 덕분에, 지금의 캐스팅을 완성할 수 있었다.
질문) 제작지원 받을 때, 피칭을 잘하는 꿀팁 같은 게 있으신지 궁금하다! 그리고 어떤 질문이 대체로 나왔는지?
정) 부산영상위원회 2차때는 긴장감이 극에 달했는지 청심환을 먹고서도 마이크를 쥔 손이 좌우로 흔들렸다. (웃음) 그 영향 때문인지 탈락하게 되었다. 이후 영화진흥위원회를 준비하면서는 첫 경험에서의 실패를 계기로, 이번에는 오히려 ‘기세로 밀어붙여야겠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고, 스스로도 놀랄 만큼 당차게 나갔다. ‘자신감을 연기한다’는 마음가짐이었다. 당시 2차 심사는 지금처럼 비대면이 아니라 심사위원들이 둘러앉은 가운데 진행되는 면접 형식이었는데, 한쪽에서는 시나리오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질문이, 다른 한쪽에서는 작품의 필요성 자체를 의심하는 날카로운 질문이 번갈아 이어지는 분위기였다. 이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에는 담담하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부정적인 의견에는 “그렇게 보실 수도 있지만 저는 이런 이유로 이 이야기를 썼고 잘 해낼 자신이 있다”는 식으로 답변하며 끝까지 밀고 나갔다. 돌이켜보면 경험이 부족한 상황에서 “장편을 해낼 수 있겠냐”는 질문은 두 심사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받았던 핵심 질문이었고, 그에 대한 확신을 증명하기 위해 결국은 일종의 ‘패기’를 전면에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 와서 그것을 무조건적인 방법으로 권하기는 어렵지만, <정순>의 경우에는 그때의 패기로 끝까지 밀어붙였던 선택이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던 것 같다.
대개 지역에서 영화를 만드는 환경에 대한 질문과 함께, 당시에는 중년 여성 서사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질문도 종종 받았다. 심사 과정에서는 지역 제작 환경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상태라는 인상을 받아 그 부분을 보완해 설명하는 데 집중했다. 두 번째 장편의 경우에는 이미 전에 합을 맞췄던 PD와 다시 함께하게 되면서, 이미 검증된 작업 파트너라는 점을 강조할 수 있었고, 해당 PD님 역시 부산에서 여러 편의 장편 제작 경험을 갖고 있어 지역 기반 제작 역량을 설득력 있게 어필할 수 있었다.
<정순> 스틸
질문) 금순 배우와 감독이 생각하는 대사에 대한 해석이 다를 때도 있었고, 오히려 그런 지점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하셨다. 그럼 연출 과정에서 배우에게 디렉팅을 어떤 방식으로 소통하시는지 궁금하다.
정) <정순> 작업 때 김금순 배우와 작품을 해석하는 큰 차이는 많지 않았다. 그런데 딸 유진과의 관계에서 관계 톤에 대한 시각 차이가 있었다. 금순 배우님(정순 역), 선아 배우님(유진 역)은 처음에는 살갑고 가까운 모녀 관계로 생각하셨다. 그런데 저는 경상도에서 나고 자라다보니 모녀 관계를 서로에게 유일한 존재이지만, 마냥 다정하지만은 않고 다소 거칠때도 있고 티격태격하는 현실적인 관계를 원했다. 촬영 전에 미팅을 통해 그런 부분을 말씀드렸고, 현장에서는 ‘지금보다 더 무심한 느낌이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씀드리며, 대사의 온도나 거리감을 조금씩 조율해나가며 원하는 톤을 맞춰나갔다.
다만 전반적으로는 배우의 해석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결을 해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느꼈다. 실제로 현장에서 배우가 제안한 방식이 더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이를 최대한 반영하려고 했다. 또한 배우마다 작업 방식이 다르다는 점도 중요한 요소였는데, 예를 들어 공장 관리자 도윤 역의 용준 배우는 사전에 아이디어도 많이 내고, 애드리브를 많이 준비해와주시는 타입이라 가능한 한 많은 대화를 나누려 했고, 반대로 금순 배우와 선아 배우는 현장에서의 즉흥성과 반응을 더 중시하는 스타일이어서 실제 촬영에서의 현장감과 호흡을 서서히 맞춰가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결국 각 배우의 성향에 맞춰 디렉팅 방식을 유연하게 조정해가는 과정이 중요했던 경험이었다.
마무리 소회) 겸연쩍고 쑥스러운 자리일 수 있던 날을 함께해주신 감독님들 덕에 편안한 시간으로 채울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비슷한 경험과 과정을 통과하고 있는 동료 여성감독님들이 계시고, 소속되어 있고, 서로를 바라봐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창작자로서 큰 안정감과 안전함을 느낍니다. 저도 감독님들께 그런 존재이길 바라며, 무한한 응원을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