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감독 작업노트.

여성감독 케이스 스터디 : 가장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영화만들기 A-Z

작업노트 ▶ <여성감독 작업노트 : 기록 14> 김희정 회원의 "축제와 일상 사이" · 2026.04.25


축제와 일상 사이


<설행, 눈길을 걷다>, <프랑스 여자> 그리고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김희정 회원


6th 여성감독 작업노트 "가장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영화만들기 A to Z"


일시: 2026. 4. 25 토

장소: 서울여성플라자


발표: 김희정 감독

사회: 정지혜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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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파리 그리고 영진위”


폴란드 우치 국립영화학교에서 7년간 유학을 하고 한국에 들어왔다. 그 당시 싸이더스가 좀 핫할 때, 봉준호와 장준환이 동시에 존재하던 그 시절에 싸이더스에서 공장처럼 시나리오를 쓰다가 도저히 길이 안 보였다. 여기서 이러고 있다간 감당 못할 것 같다 싶던 차에, 당시에는 초창기였던 ‘깐느 영화제 레지던시’를 접했다. 첫 번째, 두 번째 장편을 준비하는 감독들에게 기회를 주는, 지금도 하는 프로그램인데 상당히 추천한다. 4-5개월동안 파리 몽마르트 언덕 밑에 아파트를 주고 여섯 명의 세계의 감독들이 같이 사는 거다. 분기별로 봄, 겨울 두 번이 있는데 난 겨울이라 다행이었다. 봄이었으면 내가 파리에서 얼마나 술을 많이 마시고 놀았겠나? 파리는 매일이 파티인데.


그 프로그램에서 <사울의 아들> 시나리오가 나오기도 하고 지금은 세계적으로 너무나 유명해져서 경쟁률이 세졌지만, 그럼에도 정말 추천하고 싶다. 나이가 젊을수록 그런 프로그램에 뽑히는 데 유리하니까. 거기는 진짜 아무것도 요구하는 게 없었다. 조건은 단 하나, 어떤 시나리오를 쓸 것인가. 거기서 나는 <열세 살, 수아> 시나리오를 썼다. 그 당시 내가 느꼈던- 여러분도 아마 많이 느끼실- 불안감이 있었다. 어떤 네임밸류를 갖지 않으면 뭔가 대비할 수 없을 것만 같다는 불안감. 그것 때문에 내가 찾아낸 방법이 이런 종류의 국제적 지원사업, 레지던시 프로그램들이었다. 그렇게 쓴 <열세 살 수아> 시나리오부터 시작해서 이제 영화진흥위원회와의 기나긴 여정이 시작되는데…(웃음) 요는, 영화진흥위원회의 도움과 레지던시 같은 프로그램들을 좀 많이 추천드린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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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여자> 스틸


“4년에 한 번씩, 올림픽처럼 영화하기”


폴란드에 있을 때 일간지 신문에서 대문짝만하게 다리가 끊어진 사진을 봤다. 충격이었다. 성수대교는 우리 집 근처였다. 언젠가 내가 이거를 한 번 해야지, 나 이걸 기억해야지, 나는 어쨌든 기억하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청포도 사탕>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아역으로 출연했던 배우 뿐만 아니라 나와 함께한 아역들이 다 너무 잘 됐다. <열세 살, 수아>의 이세영 배우도, <청포도 사탕>의 이유미, 김보라 배우도,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의 문우진 배우도 다 너무 잘하고 있어서 기분이 좋다. 


그렇게 <청포도 사탕> 이후 마치 올림픽 하듯 4년에 한 번씩 영화를 찍고 있는데, <설행: 눈길을 걷다>라는 영화는 전주 시네마 프로젝트 작품으로 뽑혀서 전주영화제가 제작했다. 다 이렇게 어떻게든 돈의 흐름을 찾아서…!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박소담 배우가, <검은 사제들>의 오디션을 이제 막 본 시점, 아직 알려지기 전의 시점이었다. 그래서 난 소담이가 내 작품이 데뷔라고 GV마다 말하고 다녔다. (웃음)


<프랑스 여자>는 노르망디에서 찍었는데, 이것도 의미가 깊다. 폴란드에서 7년, 그리고 말했다시피 파리에 있었고, 그 파리에 있었던 친구들 중 한두 명을 뽑는, 노르망디- <쥘앤짐>, <400번의 구타>를 찍은 ‘예술가의 집’이라는 곳- 에서 하는 레지던시가 또 있었다. 이상하게 그런 운이 좋다. <청포도 사탕>이 거기서 쓴 시나리오다. 그런데 그때 그 레지던시를 하고 그 장소에서 <프랑스 여자> 장면을 찍은 거다. 참 묘한 재미가 있었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는 처음으로 내가 쓴 시나리오가 아닌, 김애란 작가의 단편을 원작으로 해서 만들었다. 소설집 <바깥의 여름>을 처음 김애란 작가로부터 건네받은 것이 바르샤바에서였다. 김애란 작가도 레지던시로 왔었고, 소설집을 2017년도에 직접 받았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이걸 작품화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중에 “몇 번 전화드렸는데 바쁘신 것 같아 편지로 인사드려요. 직접 찾아봬야 하는데 방법이 없어 지용이 친구에게 연락처를 물었습니다”라는 부분이 나온다. 그 부분 때문에 내가 이 작품을 각색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원작에는 아이들 부분이 없다. 난 아이들이, 특히 지용이 친구가 너무 궁금했다. 그때 당시 10대 아이들이 너무 궁금해서 그들과 관련한 시나리오를 쓰고 있던 때라 더 그랬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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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정 감독 X 정지혜 감독 대담 및 질의응답


정: 김희정 감독님과는 2019년도에 부산영상위원회 기획 개발 멘토링 사업으로, 멘토와 멘티 관계로 처음 만났다. 그 만남이 WDN까지 나를 이끌어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때 감독님도 광주에 계셨었고, 나도 지역에서 영화를 하며 롤모델이 될만한 여성 감독님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멘토가 되어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자리가 더 뜻깊다.

그때 감독님께서 연극 먼저 공부를 하시다 영화 쪽으로 넘어오게 되셨단 이야기를 들었고, 게다가 연기에 대한 경험이 있으시단 것도 이번에 알게 됐다. 그와 관련해 듣고 싶다.


김: 폴란드로 유학을 간 것도 사실 처음엔 연극을 공부하러 간 거였다. 그때가 IMF가 터지기 전이라 나라에 돈이 많았고 모두가 유학을 가곤 했다. 잘 살아서라기보다, 우리 엄마가 곗돈을 타서 나를 유학보낸 셈이다. (참고로 엄마는 내 모든 영화에 출연하셨다.)

처음부터 이야기해보자면, 고등학교 때 연극 연기를 했었고 배우가 되고 싶었고 나름 잘한다는 소리도 들었다. 왜냐면 나는 감정이 되게 풍부하고 목소리가 크니까. 그래서 연기과 시험을 봤는데 잘 안 됐다. 그땐 막 예뻐야 되고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고, 또 그때 해보니 연기란 잘못했다간 본전도 못 찾는 직업 같더라. 이 깊이감을 내가 표현할 수 없다면 하지 말아야 되는 종류의 직업이구나 싶었고, 난 일단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 대사를 못 외웠다.(웃음) 하여튼 그때 피부로 느낀 듯하다, 배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근데 난 하면 또 되게 잘하고 싶은 사람이라, 이걸로는 내가 잘할 수가 없겠다는 어떤 본능적인 파악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방향을 틀어 글을 써서 서울예대 극작과를 나왔다. 거기서 김광림 선생님(<살인의 추억>원작, <날 보러 와요> 희곡 작가)이 교수님이었는데 날 보더니 “너는 연출인데?”라고 하시는 거다. 난 희곡을 쓰러 갔는데… 그래서 그때 ‘공연 예술 아카데미’라고, 덕수궁 안에 1년에 25만원짜리 프로그램이 있단 걸 알게 됐다. 나는 진짜 운이 좋지, 그런 것만 잘 찾아낸다. 그러니까 사람들을 많이 알고 정보가 중요한 것 같다. 하여튼 그런 경험들 후에 주변에서 모두 유학가는 걸보고, ‘유학을 갈 거면 뭐하러 미국엘 가는 거야? 기왕이면 영어 말고 모르는 말을 하는 데로 가야지!’ 이렇게 치기어린 생각을 했다. 그래서 폴란드를 선택한 거다. (물론 폴란드 연극 연출가인 그로토프스키를 좋아했고, 서구 서유럽과 미국에 비하면 돈이 훨씬 싸게 들겠구나 하는 나름의 머리를 굴린 선택이기도 했다.)

그렇게 폴란드에 갔는데, 슬라브 어족 사람이 아니면 연극학교는 입학을 못한다는 거다. 언어예술이니까. 그래서 어떡하지 하는 차에 그곳에 우치 영화학교가 정말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걸 알게 된 거다. 그래서 아까 처음 이야기한 폴란드 우치 영화학교의 7년 유학이 시작됐다.


길게 말한 이유는, ‘알 수 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다. 그러니까 어디가 나랑 맞을지는 해봐야 아는 거다. 결국 난 연극 연출도 해봤고 연기도 해봤지만 영화 연출이 제일 잘 맞는 사람이고 제일 즐겁고 내가 원하는 게 다 있다. 내가 문학도 미술도 음악도 진짜 좋아하는데 영화 연출 안에 그게 다 있고, 그걸 최고로 잘하는 사람들을 내가 조율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나한테 되게 좋은 직업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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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스틸


정: 영화 촬영 전에 배우와 거리를 좁히기 위해 시간을 많이 들이시는 걸로 알고 있다. 배우와 어떻게 가까워지는 편인가?


김:  박하선 배우가 이런 말을 했다. “감독님 저는 정말 친한 친구를 1년에 몇 번 만날까 말까예요. 제가 감독님을 몇 번이나 만났는지 아세요?” (웃음) 나는 배우와 사전에 뭘 되게 많이 같이 한다. 같이 영화도 보고 전시도 보고 밥도 먹고 술도 먹고… 물론 폴란드에서 생긴 습관이 바탕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내가 기질이 좀 그런 사람인 것 같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하고든 되게 빨리 친해진다. 게다가 폴란드에 있을 때는 언어가 잘 안됐기 때문에, 배우들이 내 말을 이해하는지가 상당히 불안했고 그래서 집에도 미리 많이 데려오고 이야기나누고 그랬다. 그게 한국에 와서 배우와 관계를 맺을 때도 이어진 거고. 전주에서 모텔을 잡고 합숙을 했을 때, 세영이(이세영 배우)는 내가 부른다고 하니 굉장히 긴장하고 내 방에 왔다고 한다. ‘감독님이 무슨 말씀 하실까요?’ 했는데, 영화 얘기는 하나도 안 하고 서로 샴푸 이야기 같은 수다만 떨었다는 거다. 특히나 그때 세영이는 14, 15살 즈음이었는데 서로 무슨 말을 하겠나? 그냥 쓸데없더라도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익숙해지는 거다. 그래야 촬영장이 빨리 돌아간다. 내가 회차를 좀 줄이는 감독으로 유명하거든. 그게 내 방식이다. 다만 감독마다 방식은 다 다르다고 생각한다. 프랑스 감독 브루노 뒤몽은 ‘배우랑 왜 친해지나? 그들은 완전히 다른 개체이고 나는 친해질 생각이 전혀 없으며 친해지면 안된다고 생각한다’고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심정’이라고 비유하더라. 영화를 그렇게 고난으로 생각하는 감독도 물론 있다. 하지만 난 내 영화를 찍는 모두가 재미있었으면 좋겠다. 나와 함께하는 키 스탭들은 나와 계속 같이 한다. 이제 정말 유명한 작품들을 하는 베테랑들인데도 상업영화 찍다가 내 영화를 찍으러 와준다. 그게 되게 감사하고 내 재산이라고 생각한다.


정: 감독님께서 그런 파트너십을 구축하고 계신다는 것이 사실 제일 본받고 싶은 점 중에 하나다. 감독님은 방학 기간을 활용해서 영화를 촬영하신다고 들었는데, 회차 절약이나 해외 촬영에 대한 비결도 그렇고, 보통 어떤 식으로 준비나 일정 정리를 하시는지 무척 궁금하다.


김: 나는 시나리오를 쓴 대로, 다 준비하고 찍는 편이다. 물론 ‘현장의 문을 살짝 열어놓기’는 한다. 바뀌는 것들에 적응하는 순발력은 있다. 예를 들어 <청포도 사탕> 때 시간이 모자라서 차 안에서 찍어야 되는 한 씬을 아예 통째로 못 찍었다. 대사도 많은데 어떡하나 하다가, 태종대 장면이 있는데 거기서 카메라를 놓고 롱테이크로 걸어오면서 그 씬을 찍는 걸로 바꿨다. 없었던 장면이 생긴 셈인데 오히려 훨씬 좋았고 그 장면이 인상적이라는 관객도 많았다. 그렇게 현장에서 바뀌는 경우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굉장히 많이 잘 준비해야 한다.


조선대학교에 출강을 하고서부터는 방학을 이용해서 영화를 찍는데, <프랑스 여자>랑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는 정말 쉽지 않았다. 지구 온난화! 날씨가 너무너무 덥고, 너무너무 추웠다. <프랑스 여자>때는 배우가 정말로 잠깐 기절을 했었다. 너무 더운데 배경은 겨울이니까 막 코트입고 찍고… 그때가 아마 100년만에 찾아오는 무더위 그런 때였다. 이제는 정말 계절에 한계도 있고 나도 부교수가 되었으니, 한 달 정도는 어떻게 학교에 이야기를 해서 방학 전에 찍어볼까 그런 생각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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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포스터


정: 전 감독님의 영화 음악도 너무 좋아해서, 음악감독님과의 작업방식도 궁금하다.


김: 작업 논의는 거의 시나리오 때부터 한다. 이야기를 먼저 해두고, 촬영 후 소스를 보내주면 여러 음악을 작업해서 보내주는데- 이 폴란드 음악 감독이 일을 너무 많이 한다. 이 친구는 남편도 촬영감독이고 우치 음악학교를 다녔다. 아시다시피 동유럽 쪽이 음악 인프라가 상당히 좋다. 내게 여러 아이템을 보내주는데, 나는 좀 정확히 피드백하는 편이다. ‘이건 별로다’, ‘이건 아니야’, ‘좀더 빠른 걸 원한다’ 이런 식으로. 더 구체적으로 말을 해야 좀 진행이 된다. 인연이 깊은 게 영화학교 졸업영화 음악을 마줴나(음악감독)가 했었다. 그 이후로 꾸준히 같이 작업하고 싶다고 연락을 줬었다. 너무 잘 알고 친하니까, 작업 같이 하기 전에도 내가 폴란드에 갔는데 자기를 안 부르면 폴란드 친구들에게 화를 낼 정도다. 결국은 작품을 이렇게 하게 됐고 다음 작품도 아마 기다리고 있을 거다, 감사하게도.

<프랑스 여자> 때, 우리가 비행기 값도 못 주는데 이 음악감독이 남편이랑 파리로 날아왔다. 나 때문에 파리에 처음 왔다고 하는데, 되게 즐겁게 보내고 갔다. 그때 박정훈 촬영감독과 파리에 갔었는데 우리 촬영팀이 일하는 걸 보고 너무 체계적이라 깜짝 놀랐다고 하더라. 난 이럴 때 참 행복하다. 스태프들이 인정받을 때, 서로 인정할 때.

예를 들어 오늘 이 자리에 내 모든 작품을 가족처럼 함께한 김소연 분장실장이 동석했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서 박하선 배우 등에 열꽃이 피는 장면이 있었는데, 내가 ‘이게 아닌 것 같다’고 피드백하면 바로 더 진하게 한다든가 그런 작업을 김소연 분장실장이 해줬다.

폴란드 스태프들이 입을 떡 벌리고, ‘이걸 15분 만에 저렇게 그린다고?’ 하며 그 실력에 놀라기도 했다.


질문: 말씀해주신 레지던시나 해외 경험 덕에 공동 제작에 좀더 열려 있으셨던 건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런 레지던시/유학 경험이 어떤 자산을 남겼다고 생각하시나?


김: 자산이 너무 많다. 그러니까 일단 다 나가보기를 추천드린다. 거기서 뭘 배웠다기보다는, 나가면 철저히 독립을 하고 부딪히게 되는데 그게 중요하다. 특히 젊을 때! 레지던시는 정말 시작하는 사람들한테 되게 좋은 프로그램이다. 물론 쉽지는 않다. 하지만 난 기질적으로 맞았던 것 같다. 전혀 모르는 나라로 간다는 게 두렵지가 않았으니까. 그 나라 말 진짜 모를 때, 그래서 그 나라 친구들이 "희정이란 이름이 너무 기니까 희라고 부르면 안돼?" 라고 하면 -그 친구 이름이 마렉이었는데- "야 내가 너 마라고 부르면 좋냐?" 라고 바로 받아칠 정도로, 난 그런 성질의 사람이었다. 아무도 건드릴 수도 얕잡아볼 수도 없고 가만히 있지도 않았거든. 그런 게 외국생활하는 데는 되게 좋았다.

어느 교수에게 뭘 배우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예를 들면 서울예대 극작과를 가서 좋았던 건 딱 하나, 정말 많은 희곡을 읽었단 사실이다. 그 당시 스물 몇 살 때여서 더욱 그랬던 거지, 지금 하면 그런 효과를 얻지 못한다. 하지만 그때 읽은 희곡들이 진짜 많은 자양분이 됐다.

물론 힘든 일도 우는 날도 많았지만… 안 힘들면 성숙해지질 않는다. 늘 대가는 따르는 거다.


질문: 국제 공동제작 방식 관련해 궁금증이 많다. 아무래도 프랑스나 폴란드에서 촬영할 때는 현지 스태프들이랑 한국 스태프들이랑 이렇게 같이 촬영을 할 텐데, 그렇다면 폴란드 친구가 와서 촬영을 한다든지, 외국 스탭이 한국에서 같이 촬영하는 것도 고려하시나?


김: 폴란드 촬영 감독들은 한국에서 너무너무 촬영하고 싶어한다. 나와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폴란드촬영을 같이 했던  폴란드 촬영감독 아르투르는 계속 자신의 상황을 업데이트해주며 한국에서 영화를 찍고 싶다고 어필한다. 한국의 위상이 정말 너무 좋아졌다. 내가 처음 한국에서 나갔을 때는 택시기사가 ‘너 어디서 왔어? 사우스 노스?’ 맨날 이런 수준이었는데… 한국의 위상이 커졌으니까, 예산만 된다면 폴란드에 좋은 촬영 감독들 진짜 많고 협업을 추천한다. 촬영도 정말 잘한다. 한 번은 너무 부드럽고 우아하고 아름답게 찍혀서,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서는 전체적인 일관성을 위해 그 트래킹샷을 빼기도 했다. 그 정도로 잘하지만, 한국으로 부르고자 하면 비행기값과 숙박비 등 추가비용이 들기 때문에 여건이 맞아야 할 거 같다.  음악감독과 작업하는 건 온라인으로 작업할 수 있으니 예산이 적어도 해봄직하겠다. 한국은 지금 이끄는 나라라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깜짝 놀랄만큼 위상이 달라졌다.


질문: 시나리오 쓰는 것을 제외하고, 연출력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할 때가 있다. 감독님이 보시기에 연출력이란 무엇인가?


김: 연출력은 ‘다’인 것 같다. 좋은 의견을 듣고 한쪽 귀를 열되 너무 속지는 말고, 그런 모든 것들이 연출력이지 않을까? 좋은 배우를 캐스팅하는 것도, 연기를 조율하는 것도, 모든 것이 연출이다. 일관성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은 항상 좀 귀가 펄럭이는 존재들이라 현장은 고민의 연속인데, 전체 톤을 잡고 책임지는 건 감독이다. 아까 폴란드에서 찍은 트래킹샷이 ‘너무 아름다워서 뺐다’고 했듯, 어떤 한 장면은 좋더라도 그것이 전체를 망칠 수 있다. 항상 학생들 촬영 나가기 전날, ‘처음 네가 이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했을 때 왜 그랬는지를 다시 생각해보라’고 한다. 왜 이 얘기를 시작했고 여기까지 왔는지, 그 초심을 기억하는 게 중요하고, 절대 포기 못하는 것을 지키는 것도 필요하다. 원래 하려고 했던 게 길을 잃어서 엉망진창인 어떤 자식이 나오기도 하고 막 그러거든. 그러지 않으려면 계속 떠올려야 한다. 그래서 작업일지를 쓴다. 날마다 지금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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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연극에서 영화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내면의 마찰이나 변화가 있으셨는지?


김: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너무 좋아했는데 나는 항상 카메라가 좀 두려웠다. 그 기계를 어떻게 다룰지 잘 모르는 것 같은 느낌. 연극은 제 4의 벽이란 게 있는데, 카메라가 이 앞으로 올 수도 있단 걸 깨닫는 시간이 걸렸다. 생각보다 고정관념 깨는 게 상당히 오래 걸린다.

그래서 연극 무대처럼 생각을 많이 했었고, 나의 그런 면을 영화 학교의 TV 스튜디오 수업 때 깨달았다. 근데 지금도 여전히 내 영화는 연극적이라는 얘기를 듣는다. 하지만 학생들한테도 항상 하는 말이, 감독이 처음에 어디서 왔는지를 보라는 얘기를 많이 한다.

감독의 시작을 보라고 항상. 예를 들어 펠리니가 캐리커처를 그렸고, 까이에티 시네마에서 평론하던 사람들이 영화를 찍고 그런 것처럼, 관심 있었던 매체들이 감독마다 있지 않나. 그림을 그렸든지 문학 쪽에서 시작했든지 나처럼 연극에서 시작을 했든지… 내가 연극적이라면, 그게 나의 출발이자 색깔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질문: 회차를 줄이거나 할때 어떤 준비가 도움이 많이 되나? 물론 글쓸 때부터 준비하시겠지만, 제작자와도 그런 부분까지 사전에 소통을 많이 하시는지 궁금하다.


김: 일단 테이크를 많이 안 가면 된다! 다만 모든 테이크를 영화에 들어갈 거라 생각하고 찍어야 한다. 키 스텝들을 잘 꾸리면 완전히 프로들이니까 자기 팀별로 준비를 너무 잘하고 서로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잘 알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안 걸린다.

난 내가 다 컨트롤을 해야 되는 창작자이기 때문에 특별히 제작자의 간섭은 없다. 그런 간섭을 싫어하기도 해서 예산이 적은 작품들을 했다고 본다. 결국 죽이 됐든 밥이 됐든 감독의 영화라고 생각하지만, 좋은 스태프와 작업을 같이 하고 같이 이해하는 관계들이 쌓이면 훨씬 좋다. 그게 제일 중요하다. 당연히 회차 얘기도 하고 성질도 내게 되지만, 일단 이 작품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화를 내진 않고, 어떻게 되게 만들까를 고민한다. 동반자적인 관계라고 생각한다.


질문: 감독의 일관성과 초심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해주셨는데, 그게 첫 영화때는 쉽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감독님의 처음은 어떠셨는지 궁금하다.


김: 폴란드에서 찍은 첫 영화는 완전히 망했다. 최저점이 3점이었는데 3점을 받았다. 그래서 두 번째 영화 <아버지의 초상>은 이를 갈았다. 애니메이션과 친구에게 밥 사주고 스토리보드를 그리게 부탁하고 똑같이 찍었다. 그런 식으로 조금씩 다시 시도했다. 한 번은 교수님이 내 작품을 보면서, ‘왜 저 장면에 아무 소리도 없냐’고 물었다. 그 장면이 진주 목걸이가 떨어지는 장면이었는데, ‘그걸 좀 강조하고 싶었다’ 그랬더니, ‘얘야. 시끄러운 다음에 조용함이 있는 거야’라는 말을 그때 내게 해주셨다. 그렇지! 그런 깨달음. 그런 양반들은 말 한마디만 하면 그냥 평생 기억되는 거지. 그러면서 무슨 말을 덧붙이셨냐면, ‘지금 잘 안 들리지, 근데 곧 들리게 될 거야’라고… 그런 말씀을 해주셨다. 그러니까 그게 중요한 것 같다. 내가 존경하고 어떤 권위를 가진 누군가의 말을 듣는 것. 어떤 사기를 진작하게 해주는 것이 참 힘이 되는구나. 그래서 나도 그렇게 하려는데 쉽지가 않다. 하여튼 내 첫 영화도 완전히 아무 것도 모르고 했다.


질문: 커리어 초반에는 다큐멘터리도 하셨었다고 들었는데, 안 맞는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김: 그 다큐멘터리는 고아원이 배경이었고 고아원의 보모가 주인공이었다. 굿나잇, 밤 인사를 하는 모습을 찍고 있는데 그 애가 목을 내밀고 얘기하다가 나무 침대 창살에 목이 끼어 안 빠진 거다. 나는 그때 목을 빼러 갔다. 그랬더니 다큐 선생님이 그걸 빼러 가면 어떡하냐, 너는 그걸 찍어야지 왜 가는 거냐고 내게 말했다. 그때 확실히 알았다. 나는 다큐가 안 맞는구나.

나는 실제의 대상들과 뭘 찍는다는 게 힘든 기질이다. 영화학교 다닐때 방학 때 아빠를(지금은 돌아가신) 좀 찍으려고 해봤는데 찍다가 무슨 생각을 했냐면, ‘아니 이럴 게 아니라 난 사랑하는 우리 아빠랑 시간을 더 보내는 게 맞지, 내가 이걸 왜 찍고 있는 거야?’ 싶은 거다. 그래서 포기했다.


정: 마지막으로 전할 말이 있다면.


김: 사람 일은 정말 알 수가 없다. 내 경우를 봐도 그렇지만, 이렇게 움직여봐야 뭐가 맞는지를 알 수 있다. 그래서 학생들 가르칠 때도 꼭 그 얘기를 한다. 작가가 안될 수도 있다. 감독이 안될 수도 있다. 하지만 좋은 관객이 될 수 있고 좋은 독자가 될 수 있으며, 그것도 발견할 수 있다. 그게 최고로 중요하다. 많이 부딪히고 시련을 겪고 이런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대가가 따른다고 하지 않았나. 그 상처로 또 어느 만큼의 뭐가 나오는 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나리오 쓸 때는 누구나 죽을 만큼 괴롭다. 어차피 누구도 피해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전하며… WDN에서 나도 많은 자극을 받고 간다. 다음에 만나면 반갑게 인사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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