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만든 감독님은 어떤 사람일까? 검푸른 새벽을 울며 걷던 주인공의 얼굴을 떠올리며 상상했다. 말과 슬픔을 함께 조용히 삼키는 분일까? 주인공처럼 홀로 지내길 좋아하셨을까? 인터뷰 당일, 도착한 감독님의 집은 환하고 넓고 따뜻했다. 다채로운 이야기를 풀어내는 목소리가 단단하고 강렬했다. 고양이와 거북이와 사람이 함께 살고 있었고 넓은 창에는 시원한 빗소리가 들이쳤다. 사람이 너무 좋아 사람에게 다치고 사람과의 관계를 영화로 쓰기 시작했다는 감독님의 이야기가 질문을 시작도 전에 비처럼 쏟아졌다.
글/기록 염문경
인터뷰어/사진 염문경, 정세희

Q. 어떻게 영화를 하게 되신 건가?
A. 어릴 때부터 이야기 듣고 공상하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판타지와 공포 장르에 푹 빠져 있었는데, 스무 살이 되던 해 박찬욱 감독님의 <올드보이>를 본 이후 처음으로 다른 장르 영화에 빠지게 되었다. 영화 자체뿐 아니라 감독과 제작 과정에도 관심을 갖게 된 계기였는데 당시의 나에게 영화감독은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일처럼 보였고 나와는 먼 세계라고 생각했다.
이십대 중반, 힘든 시기를 보내던 중 이와이 슌지 감독님의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를 보게 되었는데 당시 나에게 정말 큰 위로가 된 영화였다. 그때부터 “나도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영화감독보다는 현실적으로 다가왔던 시나리오 작가를 꿈꾸기 시작했다.
이후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면서 틈틈이 시나리오를 쓰며 꿈을 키워가고 있던 어느 날, 문득 영화 현장을 경험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스물아홉, 이원석 감독님의 <남자사용설명서> 조명팀 막내로 첫 현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며 진로가 바뀌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협업 속에서 영화가 완성되는 모습을 보며 작가보다 연출에 더 큰 매력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연출을 공부하며 영화를 만드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고, 생계를 위해 회사 생활을 계속하면서도 영화에 대한 마음은 놓지 않았다. 그러다 결혼 후 인천에 정착해 지역의 다양한 영화교육 프로그램과 현장을 경험하면서,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영화의 길이 점점 선명해졌다. 그렇게 영화는 동경의 대상이 아니라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되었다.
Q. 첫 영화 연출의 맛은 어땠나?
A. 첫 연출작인 <거북이가 죽었다>를 만들 때는 사실 모든 것이 처음이라 정신이 없었다. 영진위와 인천영상위원회에서 제작지원을 받았는데, 이렇게 큰 금액으로 촬영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거든. 그동안 사비를 들여 아는 친구들끼리 습작처럼 찍었던 영화들과는 차원이 다르더라. 게다가 많은 것에 욕심을 부렸던 상황이라 부담감이 정말 컸다. 컷 수가 꽤 많았는데, 총 4회차로 12시간을 꽉꽉 채워도 부족한 상황이었기에 준비한 컷들만큼은 다 찍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 불안감에 4회차 내내 제대로 잠도 자지 못했고, 음식도 잘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촬영을 마치고 편집을 거쳐 한 편의 영화가 완성되는 과정을 경험하고 나니, 영화를 만드는 재미를 제대로 느끼게 되었다. 내가 만든 세계가 내 눈앞에 펼쳐지는 그 첫 순간의 감동은 앞으로도 매 작품 반복될 것이다. 부족한 점은 많았지만, <거북이가 죽었다>는 앞으로도 계속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확신을 안겨준 작품이었다.

<거북이가 죽었다> 스틸컷
Q. 최근 개봉한 장편 <새벽의 Tango>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늦었지만 개봉을 축하드린다.
A. 감사하다. 오늘 OST 음원도 발매되었다!
Q. 단편 <거북이가 죽었다> 이후 어떻게 바로 장편을 하게 되었나?
A. 단편영화를 만들면서 한 가지 분명하게 느낀 것이 있었다. 너무 힘들지만 그만큼 너무 재미있다는 것. 동시에 나는 단편에 특화된 창작자는 아니라는 사실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그동안 내 시나리오들은 늘 ‘장편의 축소판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실제로도 더 긴 호흡의 이야기에 끌리는 편이었거든. <거북이가 죽었다>는 예외적으로 전략을 세워 만든 단편이었다. 몇 년째 낙방이던 제작지원을 꼭 받고 싶었기 때문에. 아무튼 작품을 완성하고 나니 오히려 “이 에너지로 장편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단편을 찍을 때마다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한다면, 차라리 하루라도 빨리 장편을 경험해보는 것이 맞겠다고 판단했다. 장편을 막상 해보면 영 적성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그만두더라도 해보고 그만두자. 더 늦기 전에!
그랬을 때 생각나는 지름길은 KAFA 장편과정 하나뿐이었다. 영진위 제작지원은 설령 지원이 된다 한들 어떻게 찍어야 할지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래서 나는 무조건 이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이번에 안 되면 미련 없이 포기하자는 마음으로 전형을 준비했다. 당시 내 나이 마흔. 백수로 생활한 지 딱 3년 차 되던 시기였다. 그러다 덜컥 1차에 붙어버렸고, 이후 약 4개월 동안 전형에만 집중했다. 그렇게 여러 차례의 크리틱과 각색 과정을 거쳐서야 마침내 최종 합격 통보를 받을 수 있었다. 그때는 지금과는 달리 트리트먼트로 지원서를 넣은 후 초고와 각색고까지 거쳐야 최종결과를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었는데, 크리틱까지 포함하여 총 5차까지의 기나긴 여정이었다. 전형준비부터 최종합격까지 무려 6개월 이상의 시간이 걸린 셈이다. 2023년 5월, 최종결과를 받은 후 숨쉴 틈도 없이 바로 부산으로 내려감과 동시에, 나의 첫 장편영화 제작기가 시작되었다.

Q. 감독님이 출판사 일을 하다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고독하게, 누구와도 관계맺지 않고 떠나고 싶을때 가셨던 곳이 공장이라고 들었다. <새벽의 Tango>의 배경이 공장인 것도 그것과 관련이 있을지 궁금하다.
A. 그렇다. 공장은 나에게 일종의 도피처 같은 곳이었다. 사람과 관계에 지치거나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을 때면 공장으로 향하곤 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 시간들은 굉장히 독특한 경험이었다. 마치 현실에서 잠시 빠져나와 또 다른 세계에 들어갔다 온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주로 일했던 곳은 전자제품 공장이었는데, 창문도 없이 일정한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는 공간에서 모두가 똑같은 방진복을 입고 일한다. 그러다 보니 시간 감각도, 공간 감각도 흐려진다. 낯선 곳에 가면 아무도 나를 모르니까 잠시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든다. 힘든 일도 많고 이상한 관계도 생기지만, 한편으로는 "정 안 되면 떠나면 되지"라는 마음이 있어서 묘한 해방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곳에서는 갑자기 사람이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다. 마치 영화 속 등장인물이 등장하고 퇴장하는 것처럼. 지금 생각해보면 나에게 공장은 또 하나의 영화 속 세계였던 것 같다. 흥미로운 건, 관계를 피해 들어간 공간에서 결국 또 다른 관계들을 만나게 된다는 점이다. 낯선 사람들이 모여 함께 일하고, 부딪히고, 가까워지고, 또 헤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관계를 이야기하기에는 가장 좋은 공간이었다. 특히 전자제품 공장에는 방진복을 입고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많은데, 그들의 삶과 관계,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이 늘 흥미롭게 다가왔다.
당시 나는 공장에서 일하면서도 계속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돈을 벌기 위해 간 곳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시나리오에 담을 경험을 쌓고 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세상에 잘 드러나지 않는 그 공간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꼭 작품으로 담고 싶었다. 그래서 <새벽의 Tango>의 배경이 공장인 것도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나에게 공장은 단순한 일터가 아니라, 도망치듯 들어갔다가 수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만나고 나온 특별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Q. 감독님의 영화는 시놉시스로만 보면 사회적 부조리 이슈를 소재로 다루셨나 싶은데, 막상 영화를 보면 그게 아니라 사람의 내면을 다루며 서사가 흐른다. 결국 외부자의 시선이 아닌 내부자의 시선으로서 그 공장에서의 자기 이야기를 꺼내신 것 같은데, 맞나?
A . 정확히 보셨다. 나는 영화를 만들 때 사회적인 시선을 의도적으로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그 안에 있는 사람의 감정과 관계에 더 집중하려고 한다. <거북이가 죽었다>도 그랬고, <새벽의 Tango>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새벽의 Tango>에서 내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공장의 부조리나 산업재해 자체가 아니었다. 내 관심은 사고가 발생했을 때 그 사건을 둘러싼 사람들의 감정, 그리고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믿음과 배신에 있었다. 영화 속 주인공 역시 어떤 관계에서 상처를 입고 공장으로 도망쳐 온 인물인데, 그곳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사건을 마주하게 된다. 나에게 사고는 사회문제를 설명하기 위한 소재라기보다 인물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위한 장치에 가까웠다. 그래서 공장 역시 특별한 공간으로 그리기보다는 그저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공간처럼 보이기를 바랐다. 실제로 공장이라고 해서 모두가 부조리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가끔 "왜 공장을 배경으로 해놓고 공장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았냐"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다. 물론 그런 문제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은 공장의 부조리가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어쩌면 이것은 내 성향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어떤 부당함이나 부조리를 마주했을 때 사회를 향해 시선을 돌리기보다 먼저, 그 안에서 사람들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더 관심이 가는 편이다. 그래서 이야기를 쓰다 보면 사회적인 소재가 등장하더라도 결국에는 사람의 내면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가게 된다. 물론 그런 사회적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작품도 계속해서 해보고 싶다고 생각해왔고, 실제로 지금 그와 관련된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새벽의 Tango>에서는 문제 자체보다는,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새벽의 Tango> 스틸컷
Q. 그렇다면 <새벽의 Tango>는 근본적으로 무엇에 대한 이야기인가? 감독님에게는.
A. <새벽의 Tango>는 결국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처음에 나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도 “관계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였다. 나는 그 답이 ‘믿음’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믿음은 단순히 상대를 믿는 마음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관계에 대해 내가 책임지겠다는 마음이 함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더 신중해질 수 있고,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을 때도 무작정 상대를 원망하기보다 스스로 감당할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새벽의 Tango>는 믿음과 책임에 대한 이야기이자, 관계를 잘 맺고 살아가고 싶은 한 사람의 바람이 담긴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그렇게 살고 싶고.
Q. 더 책임을 지려고 하면 더 상처받을 수도 있지 않나? 좀더 설명해달라.
A. 내가 말하는 책임은 일이 벌어진 뒤에 모든 결과를 떠안으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지. 내가 책임을 진다고 생각하면 누군가를 믿기 전에 훨씬 더 신중해지지 않겠나. 이 관계에 어느 정도까지 마음을 줄 수 있는지, 어떤 결과가 와도 감당할 수 있는지를 먼저 생각하게 될 테니까.
사실 <새벽의 Tango>의 출발점이 된 사건도 실제 내 경험이었다. 당시에는 너무 억울했던 것이, 그저 사람을 믿었을 뿐인데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관계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우리는 누군가를 믿고, 좋아하고, 마음을 준다. 그리고 그 믿음이 기대와 다른 결과로 돌아왔을 때 상처를 받는다. 나 역시 처음에는 상대를 원망하고 상황을 원망했다. 그런데 결국 처음 믿기로 선택한 사람도 나 자신이었다. 그래서 내가 말하는 책임은 ‘내가 믿기로 선택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결국 믿음에는 언제나 위험이 따르지만 그 위험까지 감당할 생각으로 관계를 시작했다면, 결과가 기대와 달라졌을 때도 무작정 남을 탓하기보다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성인이라면 자신이 한 선택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을까.
요즘은 사람을 믿기 전에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사람이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해도 괜찮은가?”, “이 관계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아도 감당할 수 있는가?” 하고 말이다. 그 질문에 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마음을 내어주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신중함 끝에 맺어진 관계라면 더욱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쉽게 믿고 쉽게 상처받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믿음과 책임감 위에서 만들어진 관계일 테니까.
Q. 그럼 그 이야기에 탱고는 어떻게 들어오게 된 건가?
A . 탱고(감독님은 계속 '땅고'라고 정확히 발음했다)를 배우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탱고만 제대로 배워도 관계를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정도로 탱고에는 관계를 잘하기 위해 필요한 덕목들이 모두 들어 있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제일 처음 배울 때 '혼자 서는 법'을 중요하게 가르친다는 점이다. 혼자 설 수 있어야 비로소 함께 걸을 수 있다는 것. 탱고는 서로 상체를 기대어 교감하며 함께 걷는 춤이지만, 기댄다는 의미가 상대에게 내 몸을 완전히 의존한다는 뜻은 아니다. 기댄 채로 한 사람이 떠나더라도 스스로 중심을 잡고 서 있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게 나에게는 관계와 너무 닮아 보였다. 우리는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지만, 결국 각자의 중심은 스스로 잡고 있어야 하지 않은가. 그래야 건강한 관계가 가능한 것이고. 서로 기대어 있지만 무너지지는 않는 것, 적당히 의지하면서도 자기 자신으로 서 있는 것. 그래야 함께 걸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탱고의 정신이다. 앞서 이야기했던 믿음의 책임과도 비슷하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상대에게 나를 전부 맡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설 수 있는 상태에서 관계를 선택하는 것에 가깝다. 나에게 책임감은 바로 그 중심, 그 코어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새벽의 Tango>에서 탱고는 단순한 소재가 아니라 관계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를 상징하는 장치이다.

<새벽의 Tango> 포스터
Q. 극중 지원(이연 배우)과 주희(권소현 배우)는 각각 어떤 인물인가?
A. 지원은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으로 시작한다. 반면 주희는 책임을 과하게 지는 사람이다. 그러니 지원 입장에서는 주희가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물론 호기심도 있고, 연민도 있고, 여러 감정이 있지만 결국 가장 큰 감정은 불편함이다. 주희가 계속해서 책임을 지려고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지원 역시 자신의 책임을 외면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주희가 책임지는 순간, 지원도 책임져야 한다. 주희는 지원이 계속 피해 다니고 있던 질문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그래서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우정이나 연대의 이야기라기보다, 서로가 서로를 변화시키는 과정에 더 가깝다. 결국 <새벽의 Tango>는 책임을 회피하던 사람이 책임을 받아들이게 되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그런 변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한 사람과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스포주의*)
Q. 주희는 어떻게 보면 극단적일 정도로 타인에게 친절하다. 이 인물을 어떻게 구축하게 되었나? 그리고 주희가 마지막에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작가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A . 사실 두 사람은 원래라면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관계다. 하지만 지원은 이야기가 시작될 때 이미 마음을 꽁꽁 닫아버린 상태다. 누군가 다가오면 밀어내고, 관계가 깊어질 것 같으면 피하려고 하잖아. 그럼에도 주희는 지원에게 계속 다가가고, 지원은 계속 거리를 두려고 한다. 나는 이 충돌 속에서 지원이 무언가를 깨닫게 되길 바랐다. 두 사람이 정반대의 위치에 있어야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 주희의 죽음 역시 그런 맥락에서 나온 선택이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만들면서 "사람은 관계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오래 붙들고 있었다. 결국 내 대답은 "아니다"였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고, 완전히 단절된 상태로는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주희는 누구보다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고 사람에게 다가가는 인물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관계가 끊어지고 더 이상 연결될 사람이 남지 않는 상태를 가장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주희의 죽음은 이런 생각을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표현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런 관계에 대한 생각은 주희가 겪는 신체적 고통에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극중에 주희가 생리통을 심하게 겪는 걸로 나오는데, 나는 생리 역시 '관계'로 느껴지더라. 당시 관계라는 테마에 완전히 몰입해 있어서 그런지, 생리통 역시 관계적 고통의 은유처럼 느껴졌다. 생리는 착상에 실패한 자궁벽이 무너지는 과정이지 않나. 나는 그게 관계에 실패한 상태로 봤다. 주희는 거기에 남들보다 더 큰 통증을 느끼는 사람이고, 그래서 약을 먹고, 그 고통 때문에 먹은 약으로 인해 죽게 되고… 이런 식으로 주희라는 인물의 삶과 죽음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되었다.
Q. 이야기를 듣다 보니 예전에 사람을 굉장히 좋아하고 믿으셨던 감독님은 주희에 가까웠고, 또 한창 다쳤을 때의 감독님은 지원에 가까웠던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A. 지금은 그냥 그 어딘가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지원이도 사실은 주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원래 주희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더 크게 상처받았고, 더 큰 배신감을 느낀 게 아닐까. 그러니 계속 틱틱대면서도 결국은 다 받아주지. 나는 사람이 아무리 변한다 한들 무 자르듯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예전의 모습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거지. 그리고 주희는 지원의 그런 모습을 알아챘기 때문에 계속 거리낌없이 다가가는 거고. 어쩌면 지금의 나도 그 둘의 중간쯤에 있는 사람인 것 같다.
Q. 응원번개 GV때 지원과 주희의 운전 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내 반은 지원이고 반은 주희다’ 하셨던 게 기억난다.
A . 맞다. 나는 운전면허를 비교적 늦게 땄는데, 운전이 너무 무서웠다. 운전을 배워보니 바닥에 선 몇 개 그려 놓았을 뿐인데, 차들이 서로 안 부딪히고 잘 달리는 게 너무 신기하면서도 무섭더라. 특히 중앙선과 가까운 1차선을 달릴 때. 모두가 빠른 속도로 달리는데, 반대 차선에서 달려오는 차들과 금방이라도 부딪힐 것 같았다. 고작 바닥에 그어진 중앙선 하나만 믿고 모두가 목숨을 담보로 달리고 있다니… 나도 처음에는 ‘서로 교통법규를 지킬 거라는 믿음이 있구나’라고 생각을 했다가, 내가 운전할 때를 생각해보니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상대를 믿는다기보다는 나도 죽기 싫으니까 조심하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 변화가 흥미로웠다. 사람 많은 길을 걸을 때도 비슷하다. ‘서로 배려하고 있구나’ vs ‘나도 부딪히기 싫어 피하는구나’ 같은 상황인데도 상대를 믿는 시선과 그렇지 않은 시선이 공존하는 것이다. 그래서 언젠가 이러한 상황을 통해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꼭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장면만큼은 꼭 중앙분리대가 없는 도로에서 찍겠다 다짐했다.

<새벽의 Tango> 스틸컷
Q. 개인적으로 극중 한별 역 박한솔 배우에게 꽂혔다. 캐스팅 비화가 있나?
A. 다들 그런다. 신기하게 다들 한솔 배우가 엄청 매력적이라고 말해줬다. 다른 배우들도 주조연 할것 없이 모두 캐스팅에 공을 들였다. 나는 배우가 있어야 상상하며 시나리오를 수정하고 써가는 사람이다. 캐스팅한 배우 한 명 한 명이 내게 영화 속 인물 그 자체이자 각별한 인연이다.
Q. 영화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감독님 약간 어떤 분인지 알 것 같다. 첫인상은 어딘가 냉철한 커리어우먼처럼 단단해만 보였는데,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관계에 대해 굉장히 예민하시고 사람을 소중히 여기시는 것 같다.
A. 맞다. 나는 관계에 굉장히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인 것 같다. 그래서 함께했던 사람들과의 기억도 오래 남는다. 그 당시에는 모두가 서로에게 정말 진심이었고 최선을 다했을 테니까.
다만 요즘은 관계를 조금 더 신중하게 바라보려고 한다. 예전에는 누군가를 좋아하면 먼저 챙겨주고, 뭐든 주려고 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 내가 무언가를 해주면서도 은연중에 뭔가를 기대하고 있더라. 그리고 서운함이 생기는 순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결국 그 기대가 보인다. 그래서 요즘은 그런 순간들을 의식적으로 돌아보려고 한다. ‘내가 어디까지는 기꺼이 해줄 수 있는 사람인지’, ‘어디서부터 기대가 생기는지’. 결국은 바라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는 것이 가장 건강한 관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얼마 전, ‘다정함도 체력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이 참 좋더라. 결국 다정함도 무한한 것이 아니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지속될 때 의미가 있다는 거잖아. 그래서 요즘은 내 마음과 체력이 어디까지 닿는지 생각하면서, 그래도 줄 수 있으면 조금 더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Q. (*스포주의*) 마지막으로, 준비한 질문은 아니지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새벽의 Tango>는 내가 생각한 것보단 우울한 영화였다. 특히 관객들이 사랑했을 인물인 주희가 그렇게 죽어버린 게, 나는 되게 큰 결단이라고 느꼈다. 관객의 마음을 힘들게 할테니까. 아주 개인적으로, 우울하고 비극적인 결말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 감정을 같이 느껴야 하니까 보기 힘들어 피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런데 감독님이 아까 위로받으셨다고 했던 그 시절의 일본 영화들이라든지, 훌륭한 ‘우울하거나 비극적이거나 고통스러운’ 영화들을 종종 생각한다. 그런 영화들이 주는 위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A. 사실 그건 나도 오래 고민했던 부분이다. 돌이켜보면 내 삶에서 가장 어두웠던 시기와 경험들이 오히려 나를 성장시켜왔다. 나는 스스로를 좀 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뭔가를 깨닫기 위해서는 꽤 혹독한 경험을 해야 하는 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이 주는 위로는 ‘혹독한 위로’에 가깝다. 아프고 힘든 과정을 통과하게 만들지만, 결국에는 어딘가로 나아가게 해주는 위로 말이다.
주희의 죽음 역시 그런 맥락이었다. 관객들이 힘들어할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근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실제로 GV에서 왜 주희를 죽였냐고 화를 내는 관객도 있었고, 왜 착하기만 한 주희에게 벌을 주냐고 원망하는 분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주희에게 벌을 준 것이 아니라 지원에게 벌을 준 것이다. 지원은 너무 두꺼운 갑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라 웬만한 사건으로는 깨지지 않는다. 그래서 정말 소중한 것을 잃어본 뒤에야 자신이 그동안 무엇을 밀어내고 있었는지 돌아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누군가를 잃었다는 슬픔보다도,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사람의 마음을 제대로 받아주지 못했다는 깨달음에 더 가까웠다.
그리고 찍을 때는 미처 못 느꼈는데, 영화를 완성하고서야 비로소 주희의 죽음 이후의 모든 장면에서 주희가 가득 차있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엔딩 씬 같은 경우, 실제로 트리트먼트 단계에서부터 아예 ‘마치 주희가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느낌이다.’ 라고 써놓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죽음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 한 사람이 남기고 간 마음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 안에서 계속 살아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나는 죽음이라는 것이 끝이라기보다 어떤 의미에서는 영원해지는 것에 가깝다고 믿는다. 영화 속에서도 주희는 사라졌지만, 남은 사람들은 계속해서 주희를 느끼고 영향을 받는다.
어쩌면 그래서 나에게 <새벽의 Tango>는 비극이라기보다 희망에 가까운 엔딩이다. 주희는 떠났지만, 그 마음만큼은 여전히 그들 곁에 남아 있으니까.
Q. (눈물이 터졌다) 내 고양이를 떠나보내고 정확히 그렇게 생각했다.
A. 나라도 그럴 것 같다. 나는 아직 고양이들이 곁에 있는데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난다. (고양이를 소개한다) 나온 녀석은 민이, 안에 숨어있는 녀석은 국이다. 국민 고양이들.
어쨌든 그래서 나는 죽음이라는 게 끝이라기보다 오히려 더 영원해지는 순간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어떤 큰 상실이나 고비를 지나고 나면 그 사건 자체가 우리 안에 아주 오래 남을 때가 있다. 나 역시 상실을 그런 방식으로 느끼는 사람이라 <새벽의 Tango>의 엔딩도 그렇게 만들었다. 영화를 하는 이유도 비슷한 것 같다. 항상 지나고 나서 깨달으면 후회만 남지 않나. 그 후회가 자꾸 영화가 된다. <거북이가 죽었다>도 그랬다. 만약 누군가가 먼저 그런 영화를 만들어줬고 내가 그걸 봤다면, 어쩌면 더 일찍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지나가버린 일은 되돌릴 수 없으니까. 그 뒤늦은 깨달음과 후회를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서 영화를 만드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나는 밝고 즐거운 영화도 좋아하지만, 정작 내가 오래 붙들고 갈 수 있는 이야기는 늘 상실이나 죽음, 혹은 어떤 비극적인 순간을 품고 있다. 그걸 비극이라고 생각해서 넣는 건 아니다. 내게는 인물이 변화하고 성장하게 되는 하나의 굴곡점에 가깝다. 물론 모든 사람이 어둠을 통해 성장할 필요는 없다. 다만 나는 그런 사람이다.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무너지기보다는 그걸 통해 조금씩 변해왔고, 영화 역시 그런 방식으로 만들게 된다. 누구나 살면서 어둠을 만난다. 그 순간이 누군가에게는 좌절로 남을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성장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적어도 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덜 후회하고, 조금이라도 덜 돌아가는 길을 찾았으면 좋겠다.
Q. 영화를 통해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게 있다면.
A. 우리는 상처를 받거나 트라우마를 겪고 나면 누군가를 밀어내고 때로는 관계를 끊어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다 정말 소중한 인연을 놓치게 된다면? 나는 사람들이 상실한 뒤에야 뒤늦은 후회를 하기보다, 그 사람이 곁에 있을 때 그 소중함을 알아봤으면 좋겠다. 사실 이것이 내가 이 영화를 만든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관계라는 게 어떤 지점에 도달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듯, 결국 관계에는 완성이 없는 거다. 완성하려고 했다는 것이 중요할 뿐. 그렇기에 누군가가 떠났다고 해서 관계까지 완전히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이 남긴 마음과 기억이 우리의 삶 속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며 남을 것이다. 제목에 ‘새벽’을 넣은 이유도 비슷하다. 새벽은 가장 어둡고 모호한 시간이지만, 동시에 곧 빛이 찾아오는 시간이기도 하다.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결국에는 조금씩 선명해지는 순간이 분명 찾아올 것이다. 그러니, 지금 각자의 새벽을 지나고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이 말을 꼭 전하고 싶다. 언젠가 분명 빛이 찾아올 테니, 계속해서 걸음을 이어나가시길.

이 영화를 만든 감독님은 어떤 사람일까? 검푸른 새벽을 울며 걷던 주인공의 얼굴을 떠올리며 상상했다. 말과 슬픔을 함께 조용히 삼키는 분일까? 주인공처럼 홀로 지내길 좋아하셨을까? 인터뷰 당일, 도착한 감독님의 집은 환하고 넓고 따뜻했다. 다채로운 이야기를 풀어내는 목소리가 단단하고 강렬했다. 고양이와 거북이와 사람이 함께 살고 있었고 넓은 창에는 시원한 빗소리가 들이쳤다. 사람이 너무 좋아 사람에게 다치고 사람과의 관계를 영화로 쓰기 시작했다는 감독님의 이야기가 질문을 시작도 전에 비처럼 쏟아졌다.
글/기록 염문경
인터뷰어/사진 염문경, 정세희
Q. 어떻게 영화를 하게 되신 건가?
A. 어릴 때부터 이야기 듣고 공상하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판타지와 공포 장르에 푹 빠져 있었는데, 스무 살이 되던 해 박찬욱 감독님의 <올드보이>를 본 이후 처음으로 다른 장르 영화에 빠지게 되었다. 영화 자체뿐 아니라 감독과 제작 과정에도 관심을 갖게 된 계기였는데 당시의 나에게 영화감독은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일처럼 보였고 나와는 먼 세계라고 생각했다.
이십대 중반, 힘든 시기를 보내던 중 이와이 슌지 감독님의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를 보게 되었는데 당시 나에게 정말 큰 위로가 된 영화였다. 그때부터 “나도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영화감독보다는 현실적으로 다가왔던 시나리오 작가를 꿈꾸기 시작했다.
이후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면서 틈틈이 시나리오를 쓰며 꿈을 키워가고 있던 어느 날, 문득 영화 현장을 경험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스물아홉, 이원석 감독님의 <남자사용설명서> 조명팀 막내로 첫 현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며 진로가 바뀌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협업 속에서 영화가 완성되는 모습을 보며 작가보다 연출에 더 큰 매력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연출을 공부하며 영화를 만드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고, 생계를 위해 회사 생활을 계속하면서도 영화에 대한 마음은 놓지 않았다. 그러다 결혼 후 인천에 정착해 지역의 다양한 영화교육 프로그램과 현장을 경험하면서,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영화의 길이 점점 선명해졌다. 그렇게 영화는 동경의 대상이 아니라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되었다.
Q. 첫 영화 연출의 맛은 어땠나?
A. 첫 연출작인 <거북이가 죽었다>를 만들 때는 사실 모든 것이 처음이라 정신이 없었다. 영진위와 인천영상위원회에서 제작지원을 받았는데, 이렇게 큰 금액으로 촬영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거든. 그동안 사비를 들여 아는 친구들끼리 습작처럼 찍었던 영화들과는 차원이 다르더라. 게다가 많은 것에 욕심을 부렸던 상황이라 부담감이 정말 컸다. 컷 수가 꽤 많았는데, 총 4회차로 12시간을 꽉꽉 채워도 부족한 상황이었기에 준비한 컷들만큼은 다 찍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 불안감에 4회차 내내 제대로 잠도 자지 못했고, 음식도 잘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촬영을 마치고 편집을 거쳐 한 편의 영화가 완성되는 과정을 경험하고 나니, 영화를 만드는 재미를 제대로 느끼게 되었다. 내가 만든 세계가 내 눈앞에 펼쳐지는 그 첫 순간의 감동은 앞으로도 매 작품 반복될 것이다. 부족한 점은 많았지만, <거북이가 죽었다>는 앞으로도 계속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확신을 안겨준 작품이었다.
<거북이가 죽었다> 스틸컷
Q. 최근 개봉한 장편 <새벽의 Tango>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늦었지만 개봉을 축하드린다.
A. 감사하다. 오늘 OST 음원도 발매되었다!
Q. 단편 <거북이가 죽었다> 이후 어떻게 바로 장편을 하게 되었나?
A. 단편영화를 만들면서 한 가지 분명하게 느낀 것이 있었다. 너무 힘들지만 그만큼 너무 재미있다는 것. 동시에 나는 단편에 특화된 창작자는 아니라는 사실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그동안 내 시나리오들은 늘 ‘장편의 축소판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실제로도 더 긴 호흡의 이야기에 끌리는 편이었거든. <거북이가 죽었다>는 예외적으로 전략을 세워 만든 단편이었다. 몇 년째 낙방이던 제작지원을 꼭 받고 싶었기 때문에. 아무튼 작품을 완성하고 나니 오히려 “이 에너지로 장편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단편을 찍을 때마다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한다면, 차라리 하루라도 빨리 장편을 경험해보는 것이 맞겠다고 판단했다. 장편을 막상 해보면 영 적성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그만두더라도 해보고 그만두자. 더 늦기 전에!
그랬을 때 생각나는 지름길은 KAFA 장편과정 하나뿐이었다. 영진위 제작지원은 설령 지원이 된다 한들 어떻게 찍어야 할지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래서 나는 무조건 이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이번에 안 되면 미련 없이 포기하자는 마음으로 전형을 준비했다. 당시 내 나이 마흔. 백수로 생활한 지 딱 3년 차 되던 시기였다. 그러다 덜컥 1차에 붙어버렸고, 이후 약 4개월 동안 전형에만 집중했다. 그렇게 여러 차례의 크리틱과 각색 과정을 거쳐서야 마침내 최종 합격 통보를 받을 수 있었다. 그때는 지금과는 달리 트리트먼트로 지원서를 넣은 후 초고와 각색고까지 거쳐야 최종결과를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었는데, 크리틱까지 포함하여 총 5차까지의 기나긴 여정이었다. 전형준비부터 최종합격까지 무려 6개월 이상의 시간이 걸린 셈이다. 2023년 5월, 최종결과를 받은 후 숨쉴 틈도 없이 바로 부산으로 내려감과 동시에, 나의 첫 장편영화 제작기가 시작되었다.
Q. 감독님이 출판사 일을 하다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고독하게, 누구와도 관계맺지 않고 떠나고 싶을때 가셨던 곳이 공장이라고 들었다. <새벽의 Tango>의 배경이 공장인 것도 그것과 관련이 있을지 궁금하다.
A. 그렇다. 공장은 나에게 일종의 도피처 같은 곳이었다. 사람과 관계에 지치거나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을 때면 공장으로 향하곤 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 시간들은 굉장히 독특한 경험이었다. 마치 현실에서 잠시 빠져나와 또 다른 세계에 들어갔다 온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주로 일했던 곳은 전자제품 공장이었는데, 창문도 없이 일정한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는 공간에서 모두가 똑같은 방진복을 입고 일한다. 그러다 보니 시간 감각도, 공간 감각도 흐려진다. 낯선 곳에 가면 아무도 나를 모르니까 잠시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든다. 힘든 일도 많고 이상한 관계도 생기지만, 한편으로는 "정 안 되면 떠나면 되지"라는 마음이 있어서 묘한 해방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곳에서는 갑자기 사람이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다. 마치 영화 속 등장인물이 등장하고 퇴장하는 것처럼. 지금 생각해보면 나에게 공장은 또 하나의 영화 속 세계였던 것 같다. 흥미로운 건, 관계를 피해 들어간 공간에서 결국 또 다른 관계들을 만나게 된다는 점이다. 낯선 사람들이 모여 함께 일하고, 부딪히고, 가까워지고, 또 헤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관계를 이야기하기에는 가장 좋은 공간이었다. 특히 전자제품 공장에는 방진복을 입고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많은데, 그들의 삶과 관계,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이 늘 흥미롭게 다가왔다.
당시 나는 공장에서 일하면서도 계속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돈을 벌기 위해 간 곳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시나리오에 담을 경험을 쌓고 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세상에 잘 드러나지 않는 그 공간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꼭 작품으로 담고 싶었다. 그래서 <새벽의 Tango>의 배경이 공장인 것도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나에게 공장은 단순한 일터가 아니라, 도망치듯 들어갔다가 수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만나고 나온 특별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Q. 감독님의 영화는 시놉시스로만 보면 사회적 부조리 이슈를 소재로 다루셨나 싶은데, 막상 영화를 보면 그게 아니라 사람의 내면을 다루며 서사가 흐른다. 결국 외부자의 시선이 아닌 내부자의 시선으로서 그 공장에서의 자기 이야기를 꺼내신 것 같은데, 맞나?
A . 정확히 보셨다. 나는 영화를 만들 때 사회적인 시선을 의도적으로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그 안에 있는 사람의 감정과 관계에 더 집중하려고 한다. <거북이가 죽었다>도 그랬고, <새벽의 Tango>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새벽의 Tango>에서 내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공장의 부조리나 산업재해 자체가 아니었다. 내 관심은 사고가 발생했을 때 그 사건을 둘러싼 사람들의 감정, 그리고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믿음과 배신에 있었다. 영화 속 주인공 역시 어떤 관계에서 상처를 입고 공장으로 도망쳐 온 인물인데, 그곳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사건을 마주하게 된다. 나에게 사고는 사회문제를 설명하기 위한 소재라기보다 인물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위한 장치에 가까웠다. 그래서 공장 역시 특별한 공간으로 그리기보다는 그저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공간처럼 보이기를 바랐다. 실제로 공장이라고 해서 모두가 부조리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가끔 "왜 공장을 배경으로 해놓고 공장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았냐"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다. 물론 그런 문제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은 공장의 부조리가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어쩌면 이것은 내 성향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어떤 부당함이나 부조리를 마주했을 때 사회를 향해 시선을 돌리기보다 먼저, 그 안에서 사람들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더 관심이 가는 편이다. 그래서 이야기를 쓰다 보면 사회적인 소재가 등장하더라도 결국에는 사람의 내면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가게 된다. 물론 그런 사회적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작품도 계속해서 해보고 싶다고 생각해왔고, 실제로 지금 그와 관련된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새벽의 Tango>에서는 문제 자체보다는,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새벽의 Tango> 스틸컷
Q. 그렇다면 <새벽의 Tango>는 근본적으로 무엇에 대한 이야기인가? 감독님에게는.
A. <새벽의 Tango>는 결국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처음에 나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도 “관계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였다. 나는 그 답이 ‘믿음’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믿음은 단순히 상대를 믿는 마음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관계에 대해 내가 책임지겠다는 마음이 함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더 신중해질 수 있고,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을 때도 무작정 상대를 원망하기보다 스스로 감당할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새벽의 Tango>는 믿음과 책임에 대한 이야기이자, 관계를 잘 맺고 살아가고 싶은 한 사람의 바람이 담긴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그렇게 살고 싶고.
Q. 더 책임을 지려고 하면 더 상처받을 수도 있지 않나? 좀더 설명해달라.
A. 내가 말하는 책임은 일이 벌어진 뒤에 모든 결과를 떠안으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지. 내가 책임을 진다고 생각하면 누군가를 믿기 전에 훨씬 더 신중해지지 않겠나. 이 관계에 어느 정도까지 마음을 줄 수 있는지, 어떤 결과가 와도 감당할 수 있는지를 먼저 생각하게 될 테니까.
사실 <새벽의 Tango>의 출발점이 된 사건도 실제 내 경험이었다. 당시에는 너무 억울했던 것이, 그저 사람을 믿었을 뿐인데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관계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우리는 누군가를 믿고, 좋아하고, 마음을 준다. 그리고 그 믿음이 기대와 다른 결과로 돌아왔을 때 상처를 받는다. 나 역시 처음에는 상대를 원망하고 상황을 원망했다. 그런데 결국 처음 믿기로 선택한 사람도 나 자신이었다. 그래서 내가 말하는 책임은 ‘내가 믿기로 선택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결국 믿음에는 언제나 위험이 따르지만 그 위험까지 감당할 생각으로 관계를 시작했다면, 결과가 기대와 달라졌을 때도 무작정 남을 탓하기보다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성인이라면 자신이 한 선택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을까.
요즘은 사람을 믿기 전에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사람이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해도 괜찮은가?”, “이 관계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아도 감당할 수 있는가?” 하고 말이다. 그 질문에 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마음을 내어주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신중함 끝에 맺어진 관계라면 더욱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쉽게 믿고 쉽게 상처받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믿음과 책임감 위에서 만들어진 관계일 테니까.
Q. 그럼 그 이야기에 탱고는 어떻게 들어오게 된 건가?
A . 탱고(감독님은 계속 '땅고'라고 정확히 발음했다)를 배우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탱고만 제대로 배워도 관계를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정도로 탱고에는 관계를 잘하기 위해 필요한 덕목들이 모두 들어 있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제일 처음 배울 때 '혼자 서는 법'을 중요하게 가르친다는 점이다. 혼자 설 수 있어야 비로소 함께 걸을 수 있다는 것. 탱고는 서로 상체를 기대어 교감하며 함께 걷는 춤이지만, 기댄다는 의미가 상대에게 내 몸을 완전히 의존한다는 뜻은 아니다. 기댄 채로 한 사람이 떠나더라도 스스로 중심을 잡고 서 있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게 나에게는 관계와 너무 닮아 보였다. 우리는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지만, 결국 각자의 중심은 스스로 잡고 있어야 하지 않은가. 그래야 건강한 관계가 가능한 것이고. 서로 기대어 있지만 무너지지는 않는 것, 적당히 의지하면서도 자기 자신으로 서 있는 것. 그래야 함께 걸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탱고의 정신이다. 앞서 이야기했던 믿음의 책임과도 비슷하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상대에게 나를 전부 맡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설 수 있는 상태에서 관계를 선택하는 것에 가깝다. 나에게 책임감은 바로 그 중심, 그 코어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새벽의 Tango>에서 탱고는 단순한 소재가 아니라 관계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를 상징하는 장치이다.
<새벽의 Tango> 포스터
Q. 극중 지원(이연 배우)과 주희(권소현 배우)는 각각 어떤 인물인가?
A. 지원은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으로 시작한다. 반면 주희는 책임을 과하게 지는 사람이다. 그러니 지원 입장에서는 주희가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물론 호기심도 있고, 연민도 있고, 여러 감정이 있지만 결국 가장 큰 감정은 불편함이다. 주희가 계속해서 책임을 지려고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지원 역시 자신의 책임을 외면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주희가 책임지는 순간, 지원도 책임져야 한다. 주희는 지원이 계속 피해 다니고 있던 질문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그래서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우정이나 연대의 이야기라기보다, 서로가 서로를 변화시키는 과정에 더 가깝다. 결국 <새벽의 Tango>는 책임을 회피하던 사람이 책임을 받아들이게 되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그런 변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한 사람과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스포주의*)
Q. 주희는 어떻게 보면 극단적일 정도로 타인에게 친절하다. 이 인물을 어떻게 구축하게 되었나? 그리고 주희가 마지막에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작가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A . 사실 두 사람은 원래라면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관계다. 하지만 지원은 이야기가 시작될 때 이미 마음을 꽁꽁 닫아버린 상태다. 누군가 다가오면 밀어내고, 관계가 깊어질 것 같으면 피하려고 하잖아. 그럼에도 주희는 지원에게 계속 다가가고, 지원은 계속 거리를 두려고 한다. 나는 이 충돌 속에서 지원이 무언가를 깨닫게 되길 바랐다. 두 사람이 정반대의 위치에 있어야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 주희의 죽음 역시 그런 맥락에서 나온 선택이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만들면서 "사람은 관계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오래 붙들고 있었다. 결국 내 대답은 "아니다"였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고, 완전히 단절된 상태로는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주희는 누구보다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고 사람에게 다가가는 인물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관계가 끊어지고 더 이상 연결될 사람이 남지 않는 상태를 가장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주희의 죽음은 이런 생각을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표현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런 관계에 대한 생각은 주희가 겪는 신체적 고통에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극중에 주희가 생리통을 심하게 겪는 걸로 나오는데, 나는 생리 역시 '관계'로 느껴지더라. 당시 관계라는 테마에 완전히 몰입해 있어서 그런지, 생리통 역시 관계적 고통의 은유처럼 느껴졌다. 생리는 착상에 실패한 자궁벽이 무너지는 과정이지 않나. 나는 그게 관계에 실패한 상태로 봤다. 주희는 거기에 남들보다 더 큰 통증을 느끼는 사람이고, 그래서 약을 먹고, 그 고통 때문에 먹은 약으로 인해 죽게 되고… 이런 식으로 주희라는 인물의 삶과 죽음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되었다.
Q. 이야기를 듣다 보니 예전에 사람을 굉장히 좋아하고 믿으셨던 감독님은 주희에 가까웠고, 또 한창 다쳤을 때의 감독님은 지원에 가까웠던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A. 지금은 그냥 그 어딘가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지원이도 사실은 주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원래 주희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더 크게 상처받았고, 더 큰 배신감을 느낀 게 아닐까. 그러니 계속 틱틱대면서도 결국은 다 받아주지. 나는 사람이 아무리 변한다 한들 무 자르듯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예전의 모습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거지. 그리고 주희는 지원의 그런 모습을 알아챘기 때문에 계속 거리낌없이 다가가는 거고. 어쩌면 지금의 나도 그 둘의 중간쯤에 있는 사람인 것 같다.
Q. 응원번개 GV때 지원과 주희의 운전 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내 반은 지원이고 반은 주희다’ 하셨던 게 기억난다.
A . 맞다. 나는 운전면허를 비교적 늦게 땄는데, 운전이 너무 무서웠다. 운전을 배워보니 바닥에 선 몇 개 그려 놓았을 뿐인데, 차들이 서로 안 부딪히고 잘 달리는 게 너무 신기하면서도 무섭더라. 특히 중앙선과 가까운 1차선을 달릴 때. 모두가 빠른 속도로 달리는데, 반대 차선에서 달려오는 차들과 금방이라도 부딪힐 것 같았다. 고작 바닥에 그어진 중앙선 하나만 믿고 모두가 목숨을 담보로 달리고 있다니… 나도 처음에는 ‘서로 교통법규를 지킬 거라는 믿음이 있구나’라고 생각을 했다가, 내가 운전할 때를 생각해보니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상대를 믿는다기보다는 나도 죽기 싫으니까 조심하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 변화가 흥미로웠다. 사람 많은 길을 걸을 때도 비슷하다. ‘서로 배려하고 있구나’ vs ‘나도 부딪히기 싫어 피하는구나’ 같은 상황인데도 상대를 믿는 시선과 그렇지 않은 시선이 공존하는 것이다. 그래서 언젠가 이러한 상황을 통해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꼭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장면만큼은 꼭 중앙분리대가 없는 도로에서 찍겠다 다짐했다.
<새벽의 Tango> 스틸컷
Q. 개인적으로 극중 한별 역 박한솔 배우에게 꽂혔다. 캐스팅 비화가 있나?
A. 다들 그런다. 신기하게 다들 한솔 배우가 엄청 매력적이라고 말해줬다. 다른 배우들도 주조연 할것 없이 모두 캐스팅에 공을 들였다. 나는 배우가 있어야 상상하며 시나리오를 수정하고 써가는 사람이다. 캐스팅한 배우 한 명 한 명이 내게 영화 속 인물 그 자체이자 각별한 인연이다.
Q. 영화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감독님 약간 어떤 분인지 알 것 같다. 첫인상은 어딘가 냉철한 커리어우먼처럼 단단해만 보였는데,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관계에 대해 굉장히 예민하시고 사람을 소중히 여기시는 것 같다.
A. 맞다. 나는 관계에 굉장히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인 것 같다. 그래서 함께했던 사람들과의 기억도 오래 남는다. 그 당시에는 모두가 서로에게 정말 진심이었고 최선을 다했을 테니까.
다만 요즘은 관계를 조금 더 신중하게 바라보려고 한다. 예전에는 누군가를 좋아하면 먼저 챙겨주고, 뭐든 주려고 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 내가 무언가를 해주면서도 은연중에 뭔가를 기대하고 있더라. 그리고 서운함이 생기는 순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결국 그 기대가 보인다. 그래서 요즘은 그런 순간들을 의식적으로 돌아보려고 한다. ‘내가 어디까지는 기꺼이 해줄 수 있는 사람인지’, ‘어디서부터 기대가 생기는지’. 결국은 바라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는 것이 가장 건강한 관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얼마 전, ‘다정함도 체력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이 참 좋더라. 결국 다정함도 무한한 것이 아니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지속될 때 의미가 있다는 거잖아. 그래서 요즘은 내 마음과 체력이 어디까지 닿는지 생각하면서, 그래도 줄 수 있으면 조금 더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Q. (*스포주의*) 마지막으로, 준비한 질문은 아니지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새벽의 Tango>는 내가 생각한 것보단 우울한 영화였다. 특히 관객들이 사랑했을 인물인 주희가 그렇게 죽어버린 게, 나는 되게 큰 결단이라고 느꼈다. 관객의 마음을 힘들게 할테니까. 아주 개인적으로, 우울하고 비극적인 결말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 감정을 같이 느껴야 하니까 보기 힘들어 피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런데 감독님이 아까 위로받으셨다고 했던 그 시절의 일본 영화들이라든지, 훌륭한 ‘우울하거나 비극적이거나 고통스러운’ 영화들을 종종 생각한다. 그런 영화들이 주는 위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A. 사실 그건 나도 오래 고민했던 부분이다. 돌이켜보면 내 삶에서 가장 어두웠던 시기와 경험들이 오히려 나를 성장시켜왔다. 나는 스스로를 좀 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뭔가를 깨닫기 위해서는 꽤 혹독한 경험을 해야 하는 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이 주는 위로는 ‘혹독한 위로’에 가깝다. 아프고 힘든 과정을 통과하게 만들지만, 결국에는 어딘가로 나아가게 해주는 위로 말이다.
주희의 죽음 역시 그런 맥락이었다. 관객들이 힘들어할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근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실제로 GV에서 왜 주희를 죽였냐고 화를 내는 관객도 있었고, 왜 착하기만 한 주희에게 벌을 주냐고 원망하는 분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주희에게 벌을 준 것이 아니라 지원에게 벌을 준 것이다. 지원은 너무 두꺼운 갑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라 웬만한 사건으로는 깨지지 않는다. 그래서 정말 소중한 것을 잃어본 뒤에야 자신이 그동안 무엇을 밀어내고 있었는지 돌아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누군가를 잃었다는 슬픔보다도,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사람의 마음을 제대로 받아주지 못했다는 깨달음에 더 가까웠다.
그리고 찍을 때는 미처 못 느꼈는데, 영화를 완성하고서야 비로소 주희의 죽음 이후의 모든 장면에서 주희가 가득 차있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엔딩 씬 같은 경우, 실제로 트리트먼트 단계에서부터 아예 ‘마치 주희가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느낌이다.’ 라고 써놓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죽음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 한 사람이 남기고 간 마음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 안에서 계속 살아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나는 죽음이라는 것이 끝이라기보다 어떤 의미에서는 영원해지는 것에 가깝다고 믿는다. 영화 속에서도 주희는 사라졌지만, 남은 사람들은 계속해서 주희를 느끼고 영향을 받는다.
어쩌면 그래서 나에게 <새벽의 Tango>는 비극이라기보다 희망에 가까운 엔딩이다. 주희는 떠났지만, 그 마음만큼은 여전히 그들 곁에 남아 있으니까.
Q. (눈물이 터졌다) 내 고양이를 떠나보내고 정확히 그렇게 생각했다.
A. 나라도 그럴 것 같다. 나는 아직 고양이들이 곁에 있는데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난다. (고양이를 소개한다) 나온 녀석은 민이, 안에 숨어있는 녀석은 국이다. 국민 고양이들.
어쨌든 그래서 나는 죽음이라는 게 끝이라기보다 오히려 더 영원해지는 순간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어떤 큰 상실이나 고비를 지나고 나면 그 사건 자체가 우리 안에 아주 오래 남을 때가 있다. 나 역시 상실을 그런 방식으로 느끼는 사람이라 <새벽의 Tango>의 엔딩도 그렇게 만들었다. 영화를 하는 이유도 비슷한 것 같다. 항상 지나고 나서 깨달으면 후회만 남지 않나. 그 후회가 자꾸 영화가 된다. <거북이가 죽었다>도 그랬다. 만약 누군가가 먼저 그런 영화를 만들어줬고 내가 그걸 봤다면, 어쩌면 더 일찍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지나가버린 일은 되돌릴 수 없으니까. 그 뒤늦은 깨달음과 후회를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서 영화를 만드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나는 밝고 즐거운 영화도 좋아하지만, 정작 내가 오래 붙들고 갈 수 있는 이야기는 늘 상실이나 죽음, 혹은 어떤 비극적인 순간을 품고 있다. 그걸 비극이라고 생각해서 넣는 건 아니다. 내게는 인물이 변화하고 성장하게 되는 하나의 굴곡점에 가깝다. 물론 모든 사람이 어둠을 통해 성장할 필요는 없다. 다만 나는 그런 사람이다.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무너지기보다는 그걸 통해 조금씩 변해왔고, 영화 역시 그런 방식으로 만들게 된다. 누구나 살면서 어둠을 만난다. 그 순간이 누군가에게는 좌절로 남을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성장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적어도 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덜 후회하고, 조금이라도 덜 돌아가는 길을 찾았으면 좋겠다.
Q. 영화를 통해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게 있다면.
A. 우리는 상처를 받거나 트라우마를 겪고 나면 누군가를 밀어내고 때로는 관계를 끊어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다 정말 소중한 인연을 놓치게 된다면? 나는 사람들이 상실한 뒤에야 뒤늦은 후회를 하기보다, 그 사람이 곁에 있을 때 그 소중함을 알아봤으면 좋겠다. 사실 이것이 내가 이 영화를 만든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관계라는 게 어떤 지점에 도달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듯, 결국 관계에는 완성이 없는 거다. 완성하려고 했다는 것이 중요할 뿐. 그렇기에 누군가가 떠났다고 해서 관계까지 완전히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이 남긴 마음과 기억이 우리의 삶 속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며 남을 것이다. 제목에 ‘새벽’을 넣은 이유도 비슷하다. 새벽은 가장 어둡고 모호한 시간이지만, 동시에 곧 빛이 찾아오는 시간이기도 하다.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결국에는 조금씩 선명해지는 순간이 분명 찾아올 것이다. 그러니, 지금 각자의 새벽을 지나고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이 말을 꼭 전하고 싶다. 언젠가 분명 빛이 찾아올 테니, 계속해서 걸음을 이어나가시길.